s1.jpg설 교 : 석기현 경향교회 담임목사
날 짜 : 2016년 1월 3일
본 문 : 여호수아 10장 1-43절

다른 사람과 싸움이 붙었을 때 어떤 힘센 사람이 자기 앞에 나서서 대신 싸워 준다면 참으로 든든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길거리에서 불량배가 시비를 걸어오는 바람에 난감한 처지에 빠져 있는 중에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이 찾아오게 되면 절로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6.25 전쟁 때 겪은 일이지만, 적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하여 국운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울 때에는 강력한 우방국에서 원병을 보내 주는 것보다 더 반가운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전을 펼칠 당시 바로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이 10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고로”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강력한 적군을 상대로 어려운 전투가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적들과 대신 싸워 주심으로써 의외로 쉽게 연전연승하는 아주 신나는 전쟁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대신 싸우신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냥 팔짱끼고 앉아 관전만 하는 형국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창칼을 잡고 싸운 쪽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이었지만 바로 그런 과정에 하나님께서 친히 도우시며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나도록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2016년 신년주일을 맞이하면서 저는 오늘날도 과연 어떤 교회가 그런 하나님의 든든한 도우심을 받으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승전을 체험할 수 있는지를 여러분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성호’를 지극히 높이 받드는 교회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장받게 됩니다.

6절과 7절에 “6기브온 사람들이 길갈 진에 보내어 여호수아에게 전언하되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서 우리를 구조하소서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 하매 7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니라 8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고 기록했습니다.

1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시작될 즈음에 가나안 본토 부족들이 듣고 “크게 두려워하면서” 그에 대비하기 위하여 동맹을 맺었습니다.
원래는 그 가나안 부족들 가운데 기브온 족속이 가장 강력했는데, 바로 2절에서 “기브온은 왕도와 같은 큰 성임이요 아이보다 크고 그 사람들은 다 강함이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동맹의 주력이었던 기브온이 혼자 이스라엘에게 항복해 버렸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른 나머지 다섯 동맹국들은 당장 들고 일어나서 연합군을 형성하여 이스라엘보다 먼저 기브온 족속부터 없애 버리겠다고 쳐들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자 기브온 사람들은 곧 여호수아에게 사람을 보내어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서 우리를 구조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 본다면 꼭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화친을 하기는 했지만, 그저 그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을 뿐이지 보호까지 해 준다는 조항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원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을 다 진멸하려고 했었는데, 앞서 9장에 나오듯이 기브온 족속은 마치 자기네는 가나안 본토가 아니라 먼 곳에 사는 부족인 것처럼 속여서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쪽에서 본다면 그냥 가만히 있든지, 혹은 지원군을 보내더라도 일부러 천천히 출병시켜서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 괘씸한 기브온 족속이 전멸당하도록 지연작전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그 기브온 족속이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마시고”라고 다급히 요청한대로 즉시 전군을 동원하여 출병했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자기네를 속인 기브온 족속에게 그토록 신의를 발휘해 준 것이었습니까?
앞서 9장 18절과 19절에 보면 그 화친 조약을 맺은 후에 기브온 족속의 거짓말이 드러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장 그들을 다 몰살시켜버려야 한다고 흥분했었습니다.
바로 그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고 백성들을 막았습니다.
비록 속아서 맺은 약속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인 만큼 그 하나님의 성호를 조금이라도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브온 족속을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에서 그 기브온 족속을 계속 도와주기 위하여 출병까지 하는 것도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한 것에 대하여 끝까지 신의를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처럼 당신의 이름을 높이 받들고 그 성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나간 전쟁이니만큼, 하나님께서도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도와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자기 욕심만 추구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만 성취하겠다고 버둥거리면 겨우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쥐꼬리만 한 능력만 동원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그런 식으로 하는 교인은 결코 큰 열매를 거둘 수 없으며, 그런 교회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을 체험할 길이 없습니다.
목사가 자신의 사욕을 채우려고 목회를 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리 만무하고, 장로가 자신의 체면을 세우려는 마음으로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힘써 주실 리가 없으며, 전도회장이 그저 명예욕만 따라서 벌이는 일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불타오르고 우리의 손발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따라 움직이게 되면, 하나님 편에서 가만히 계시지를 못합니다.
애당초 사람이 창조된 목적부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더욱 그래야 할 텐데, 오늘날 지상교회의 현실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은 간 곳 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내 복(福)’만 받겠다고 난리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편에서는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고 그 성호를 존중하고 그 거룩하신 이름으로 약속하고 서원한 것을 생명을 바쳐서라도 꼭 지키려 하는 성도와 교회를 더더욱 아끼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경향교회의 지난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교회를 통해 계획하고 추진하는 모든 일들 하나하나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호를 높이려는’ 동기와 목적에서만 세워지니까,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앞장서셔서 그 태산과 같은 장애물들을 기적적으로 돌파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 쪽에서는 그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만 조금 내었을 뿐인데, 실제로 그 일의 성취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능력을 동원하여 완수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지극히 높이고 여호와의 성호를 영광스럽게 하고자 하는 신실한 목적만을 가지고 나아감으로써, ‘너희를 당할 자 없으리라’고 약속해 주시는 전능자의 도우심을 앞으로도 계속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 전적 헌신’을 바쳐 충성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12절 이하 15절에 “12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하매 13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14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15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길갈 진으로 돌아왔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곧 전투에 돌입했는데, 9절에 그들은 “길갈에서 밤새도록 올라가서 그들에게 갑자기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길갈에서 기브온까지는 약 20킬로미터 가까운 거리인데, 이스라엘군은 밤새도록 야간 행군을 감행한 후에 새벽녘에 적군에게 기습작전을 펼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적군의 의표를 찌른 훌륭한 전술이었고 단번에 승세를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보장해 주셨다고 하니 대충 어떻게 해도 되겠지.’ 하고 꾸물거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군은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던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전투를 시작하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워주시는 더 멋진 일이 뒤따라오게 됩니다.
11절에 보니까 적군이 도망하여 “벧호론의 비탈에서 내려갈 때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덩이 우박을 아세가에 이르기까지 내리우시매 그들이 죽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비록 기습에는 성공했지만 도주하는 적군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하면 나중에 어떤 반격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도망치려는 적군들을 향하여 하늘에서 큰 덩어리 우박을 퍼부어 내리셨던 것입니다.
당시 대포도 폭격기도 없는 시절이었지만, 그 우박 덩어리야말로 하나님께서 투하해 주시는 ‘융단폭격’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그 우박폭격을 감행하신 장소가 절묘하게도 그 퇴각하는 적군들이 “비탈에서 내려갈 때”였습니다.
우박을 한 대 맞으면 그 자리에 그냥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내리막 비탈을 뛰어가던 가속도 때문에 땅에 뒹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상도 더 악화되었을 것이고, 또한 아직 우박 맞지 않고 뛰어 내려가는 자기편의 발에 부딪히면서 같이 넘어지게 만드는 연쇄반응 효과까지도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본문 11절 끝에 기록하기를 “이스라엘 자손의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더욱 많았더라”고 그 결과를 증거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여호수아는 실로 기상천외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기브온은 바로 지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서 태양 빛이 더 오래 필요한 곳이었으며, 아얄론 골짜기는 서쪽 지역인데 그날 달이 뜨게 될 방향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다시없을 기회에 그 모든 적군을 한 명도 남김없이 섬멸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물론 밤이 되면 추격전이 불가능해질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제게 낮 시간을 더 주십시오. 그래야 이 전투를 완전히 끝낼 수 있겠습니다.”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기도는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무슨 일광의 굴절이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지구의 자전이 멈추었기 때문인지를 너무 궁금해 하며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무슨 시적 표현이나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정상적인 24시간 단위의 시간 흐름이 일시적으로 멈추는 초자연적인 사건이 정말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본문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라고 증거할 정도로, 기적 중에서도 전무후무한 기적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처럼 ‘밤새도록 달려가서’ 전투에 돌입하고 또 ‘새벽부터 종일토록’ 쉬지 않고 죽도록 싸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태양과 달을 멈추게까지 하시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시간’이 모자라지 않도록 도와주셨던 것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의 속담에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과 최고의 정성을 먼저 다 쏟아 붓는 성도와 교회를 지금도 도와주십니다.

힘든 일을 도와주러 온 친구나 이웃은 땀 흘려 일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면 어디 말이나 되겠습니까?
그래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해 놓고 도움을 받아야지, 의당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고서 남의 도움만 기다린다면 정말 염치없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그런 뻔뻔한 자세를 가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의 제단에는 조금도 내어놓지 않으면서, 그저 하나님께서 먼저 더 부어 주시면 그 중에서 조금 하나님께 사례하고 나머지는 자기 것에다가 더 갖다 붙여서 계속 불려 나가겠다는, 지극히 얄팍한 계산을 하고 있는 교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너그럽고 후하신 분이라 해도, 어떻게 그런 뻔히 속 보이는 교인을 도와주시겠습니까?

시간도 귀중한 것이지만 문제는 무엇 때문에 아까워하는가에 있습니다.
내가 더 오래 살기 위해서, 더 많이 놀기 위해서 시간 가는 것을 아까워하는 것과, 주님께서 시키시는 선한 일을 더하기 위해서 시간을 아까워하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예배드릴 시간에 먼저 예배드리고 기도할 시간에 기도회에 참석하면서 주어진 24시간과 일주일을 바삐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나머지 공부할 시간, 일할 시간, 집안일 돌볼 시간도 다 주십니다.
해까지 멈추면서 도와주셨던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루 중에 새벽기도 한 시간 지킨다고, 일주일 중에 주일 하루를 성수한다고 다른 시간이 모자라게 하시겠습니까?

오직 내가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해서 돈과 힘과 시간을 아까워하는 사람은 그것들이 항상 모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 사람의 삶을 지원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의 물질과 힘을 주님을 섬기는 일에 다 바쳐도 여전히 모자라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우리의 시간과 정성을 다 바쳐 헌신해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아쉬워하면서 죽도록 충성하는 성도와 교회에게는,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그 필요한 물질과 힘과 시간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시는 것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임전태세’를 갖춘 교회가 하나님의 승리에 동참하게 됩니다.

본문 25절에 “25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겠다는 목적으로 출전하고, 먼저 자기네들의 가진 힘과 시간을 전부 쏟아 헌신하면서 전투에 돌입했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아모리 왕들의 동맹군을 일거에 대파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5절에 이하에 보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가 그 가나안 부족 동맹군들을 그야말로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서 철저하게 섬멸시켜 버린 전모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16절부터 27절까지의 말씀에 보면, 그 날 전쟁에서 그 아모리 연합군의 다섯 왕들이 퇴각하던 도중에 “막게다의 굴”에 숨었는데 여호수아는 일단 그 굴을 봉쇄해 놓았다가 추격전이 완전히 끝난 후에 그들을 끌어냅니다.

그리고 24절에 있는 대로 여호수아는 자기의 군장들로 하여금 그 다섯 왕들의 목을 발로 밟게 한 후에 처형시키도록 합니다.
그것은 승자의 압도적으로 우월한 힘을 과시하는 행동으로서, 그 전쟁의 진짜 승자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은 무슨 원한이나 민족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대적” 즉 우상 숭배자들을 심판하는 일인 것을 일깨워 주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28절에 “그 날에”라고 시작된 말은 바로 태양을 머무르게 하셔서 적군을 추격할 시간을 더 연장시켜 주신 바로 그 날에 이어지는 다음 전투들을 계속 쉬지 않고 밀고 나갔다는 뜻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으니... 그 행한 것이 그 앞의 성읍에서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하나님의 원수였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던 만큼 하나도 살려 두지 아니하고 다 깨끗이 진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으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가는 곳마다 그 명령을 철저히 준수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군이 가는 곳마다 연전연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를 상대로 싸우는 한에는 하나님께서 당연히 그 싸움을 이기게 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교회가 승리합니까?
하나님의 원수를 자기의 원수로 알고 싸우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하나님께서 그 교회 편이 되시는 것이고 그 싸움은 백전백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적’이 누구인지를 똑바로 깨닫는 것은 군인에게 있어서 필수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대적’이 누구인지를 바로 깨닫는 것은 전투하는 지상교회와 성도에게 있어서 필수입니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 ‘영적 주적 개념’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적이라고 하지 않는데도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위해 싸워 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참된 교회가 이단을 정죄하고 우상 숭배 종교를 대항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 결핍된 탓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원수를 교회의 주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모르는 교회, 아니 하나님의 원수를 가려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교회는 사실상 이미 적군과 동조하거나 내통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주하시고 심판하실 상대와 손을 맞잡는 것, ‘종교 간의 화해’니 ‘기독교 교단 통합’ 등이니 하는 미명 아래 자행되고 있는 이 ‘적과의 동침’ 행위는, 결코 화해와 사랑의 연합이 아니라 함께 구덩이에 빠지고 함께 지옥에 떨어질 자멸행위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원수를 대항해서 싸우는 교회만이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싸워 주시는 능력에 힘입어 승리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단과 싸우고 우상종교를 진멸하는 것이야말로 곧 교회 본연의 사명과 직결됩니다.
당연한 말이 아닙니까?
이단 교회의 수가 줄어들고 우상숭배자의 세력이 약화되고 무신론 정권이 붕괴되어야 참된 교회가 더 마음껏 전도하여 택자를 모으고 신실한 성도들이 온 세계 선교를 위하여 힘을 더욱 크게 떨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원수와 싸우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거나 겁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자신의 원수로 삼으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이 그 사람 편이 되지만, 하나님의 원수와 손을 잡으면 자동적으로 그 사람도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적과 아군의 구별이 없는 희한한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온갖 종교들 간에 교묘한 화해 무드만 더욱 고조되고 있는 오늘날, 하나님의 원수를 분명히 가려내고 그들을 대적하여 싸우는 대열에 끝까지 서 있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됨으로써, 하나님께서 반드시 거두실 최후 승리에 꼭 함께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40절은 ‘가나안 남쪽 지역’ 정복을 요약한 것이며, 41절은 ‘산지와 남방 사이 지역’의 정복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은 42절에 기록된 대로 오직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고로 여호수아가 이 모든 왕과 그 땅을 단번에 취한” 대 승전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많은 땅,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들을 단번에 점령하여 자기네 영토로 삼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영적 싸움을 싸우고 그 전투에 이겨야 만이 그 자신도 살아남게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싸움을 기피하고 그저 편하게 앉아 있으려고만 하면 ‘부흥’은 고사하고 ‘생존’ 자체까지 위협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인들이 전적으로 헌신하고 죽도록 충성하면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전투하려 하지 않고 그저 ‘복’ 타령만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대신 나서 주실 리가 만무합니다.
보수주의 교회들이 자유주의 교회들과 교단 통합을 하고 형제 사랑 어쩌고 하고 있으면, 결국 그 자유주의자들에 의하여 통째로 잡아먹히고 교회와 신자뿐 아니라 참된 진리 그 자체까지 잃게 될 날만 남아 있을 뿐인 것입니다.

아직은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이 날뛰고 있는 한 그 사탄의 앞잡이들 즉 ‘하나님의 원수’들이 곳곳에서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하)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들을 대적하여 담대히 싸우면, 그런 교회와 성도는 그야말로 ‘무적’이 되고 ‘필승’을 누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직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것임을 명심하면서,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지극히 높이고 ‘정성과 힘’을 다 바쳐 헌신하며 ‘하나님의 대적’을 향한 임전태세를 늘 유지함으로써 새해에도 이 ‘경향의 산성과 요새’를 중심으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고 이기게 하시는’ 멋진 승리를 꼭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경향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