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무런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북한에서 제 부모님들은 노동자 계급에 속해 있었고, 저를 포함해 여섯 명의 자녀를 두셨습니다. 우리는 90년대 극심한 가뭄을 겪기 전까지 그럭저럭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뭄이 계속되는 동안 먹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심각한 다리 부상을 당하신 후 3개월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기둥이셨는데, 그렇게 되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집을 팔아 형수 집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돈을 벌기 위해 시장에 나갔지만 허탕만 쳤습니다. 게다가 형수는 우리를 돕는 것에 대해 몹시 싫어했으며, 그로 인해 매일 우리와 다투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게 되어 어머니는 자신이 일하는 공장의 작은 공간을 구하셨고, 우리는 그곳에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른 머물 곳이 없었기에 그 근처를 배회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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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바라 본 북한.   사진제공=오픈도어선교회
어느 날, 기차역에서 자게 되었는데 한 여인이 와서 가족을 위해 중국에 가서 돈을 버는게 어떠냐고 제안했고, 저는 다른 선택이 없다고 생각 해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 무작정 갔습니다. 중국은 제가 기대했던 곳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거기서 결혼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이 와서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저는 돈 버는 것에만 관심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모임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돈을 준다고 하기에 그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중국인 남편은 제가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는 틈을 타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하며 제가 그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계속해서 그 모임을 나갔습니다.

사실 그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술주정뱅이였고 술에 취할 때마다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게 너무 두려웠습니다. 어느 날, 그가 절 물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저는 자살시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희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살하려는 것도 결국 실패했고, 남편이 그런 저를 발견하고는 자신이 잘못했다며 울며 사죄했습니다.

그 때 제가 저 자신과 남편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나는 주님께 부르짖었고, 그리고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심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남편도 저를 위해 눈물을 흘렸고, 저는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주의 자녀로 받아 주소서.”

또한 남편이 술을 마시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남편이 더 이상 욕설이나 폭력으로 학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또한 그가 성경을 읽으며 술을 먹지 않기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주 조금씩, 남편뿐만 아니라 가족들 하나하나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남편의 마음을 정말로 다스리시고 계셨습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 저는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해 주시어 다른 북한 여성들과 여전히 북한 안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을 복음화하는데 사용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또한 언젠가 북한으로 돌아가 그곳에 있는 우리 가족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날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픈도어선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