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은 1947년 독립 이래 세 번의 쿠데타와 불안정한 정치에 시달려왔다. 군사독재의 마지막과 정권 교체는 2008년 총선 이후 5년 뒤인 2013년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민간정부로 종결되었다. 사실 강자는 정부나 군부에도 없었다. 일부의 관측은 민간정부와 군부가 함께 통치하는 것이 더 낙관적이라고 본다. 하지만 일부는 그 국가 내에 통치자들의 주도권 다툼이 실패한 결과로 일어난 현상이라고 본다. 2011년 5월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은 대부분의 파키스탄인에게 부끄럽고 충격적인 것이었다.

10년 동안 정부는 빈라덴이 그 나라에 있지 않다 주장했는데 그가 파키스탄 육군사관학교에서 몇 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군부의 역할에 대한 의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음에도 사람들은 그 실상에 대해 무감각하다. 왜냐하면 2010년 엄청난 홍수가 있었을 때 정부의 부적절한 조치와는 다르게 군부의 적극적인 구호작업과 참여들이 여전히 사람들에게 각인되어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정치적 영향력은 파키스탄군이 국가경제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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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어린이들.    사진제공=오픈도어선교회
증가하는 극단주의

이슬람의 극우주의 정당이 선거에서 넓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해도 그들의 관점은 파키스탄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있다. ‘파키스탄방위협의회’는 40개가 넘는 자하드 그룹과 급진적 이슬람 정당과 군부 등에 펼쳐져 있다. 이러한 그룹들은 큰 결속력이 있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인구의 약 30%가 최근 몇 년 동안 극단주의의 상당한 증가에도 개의치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펀자브의 장관인 살만 타시르와 소수민족 장관이자 기독교인이었던 샤바즈 바티는 2011년 초 죽임을 당했는데 그것은 복수의 법의 지배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한번 더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타시르 장관의 살해자는 백여 명의 자원 변호사들이 보수 없이 그를 기꺼이 변호해주었고, 종교당과 중요한 종교학자들로 인해 널리 유명해졌다. 라왈핀디의 반테러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그 소송은 여전히 항소 중이다. 판사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그 나라를 탈출해야만 했다. 이 모든 사건은 소수의 기독교인의 삶에 공포를 추가한다.

이웃 국가와의 긴장관계

다른 그룹과 보도에 따르면 파키스탄은 공식적으로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으면서도 파키스탄 군부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을 돕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대부분의 국제 병력이 철수하면 파키스탄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아마도 무슬림 과격주의자들과 자하드 그룹의 영향은 증가할 것이다. 인도와의 관계 개선의 조짐으로 7년 만에 처음으로 2012년 4월, 파키스탄 총리의 델리 방문이 있었으나 여전히 파키스탄과 인도는 긴장관계에 있다. 두 국가 사이의 잠재적인 추가 걸림돌은 둘 사이의 군사적 긴장과 극단주의자들 간의 경쟁이다. 또한 이 둘 사이에는 인더스 강의 물 배급과 관련한 세 번의 전쟁과 양측 조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긴장감이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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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장식을 한 파키스탄 트럭.   사진제공=오픈도어선교회
경제적 도전

파키스탄에 엄청난 인구증가가 있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청소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빈곤지수가 높아 수 백만의 사람들이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이 적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지만 생활필수품조차도 부족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파키스탄 종족들과 소수종교에 영향을 미친다.

현재 파키스탄 내에 아동들은 엄청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 대부분은 일용직 근로자이고, 고용주의 잦은 독단과 폭력적인 처우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여성과 어린이는 큰 피해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선행교육 정책의 부족은 경제 발전의 주된 장애 중 하나이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국가의 교육에 대한 낮은 투자는 마드라사(파키스탄 이슬람 교리학교, 이 학교 출신들은 탈레반에 가입하거나 자살폭탄테러를 자행하게 된다)가 성행하도록 만들었고, 이러한 이슬람 교리학교의 학생 수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략 2만 명을 초과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교육받지 못하게 하고, 가난하게 만들며 무슬림 고용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파키스탄의 기독 청년들은 무슬림 고용인 밑에서 편협적인 생각과 비관용적인 마드라사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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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에서 볼 수 있는 오토바이 택시.    사진제공=오픈도어선교회
파키스탄 교회의 실상과 역사

파키스탄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선교사들에 의해서였고, 그 후 기독교는 계속 성장해왔다. 파키스탄이 독립한 해인 1947년, 공식적으로 무슬림 국가가 되면서 소수의 기독교인은 좀 더 복잡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파키스탄의 초기 대통령인 무하마드 알리 진나는 모든 국민에게 평등을 약속했으나 후임자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2002년부터 미국 국제종교자유위원회(USCIRF)는 파키스탄을 ‘특별관심 대상국’으로 지정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미 국무부는 이러한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

인구의 약 95%가 무슬림으로 대부분이 수니파 종교에 속하지만 시아파 또한 그 수가 적지 않다. 기독교인들은 전체 인구 중 약 2.5%를 차지하는데 그 중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수가 약 3분의 1에 해당하며 개신교인들의 수는 50% 이상이다.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그룹은 4개의 주요 개신교 교파로 구성된 상위 개신교 집단인 파키스탄 성공회에 속해있다.

2011년 8월, 2년 만에 또 하나의 강력한 홍수가 파키스탄을 덮쳤다. 2010년 7월 홍수 때처럼 파키스탄 국민들을 돕기 위한 자원이 분배될 때 기독교인들은 지역 당국과 무슬림으로부터 많은 차별을 받았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문제, 변호, 법적 지원, 소수집단의 문제들과 여러 난제를 다루는 많은 비정부기관을 조직함으로써 증가하는 시민사회에 기여했다. 또한 이러한 기여는 자신들의 취약한 입장을 해결하려는 하나의 노력이었다.

기독교인들의 상당수가 천한 일을 해서 생계유지를 해야하므로 이것 역시 교회 생활을 하는 데 있어 큰 어려움이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나라의 높은 문맹률의 영향을 받고 있어 그들을 훈련시키고 가르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교회 안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과 청년 지도자들과 주일학교 교사들을 위한 훈련에 대한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오픈도어선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