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jpg나는 칠남매 중에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한 살 많은 언니가 있고, 아래로는 세 명의 여자동생과 두 명의 남동생이 있다. 남아선호사상이 짙었던 시절에 태어나 나를 비롯한 여자 자매들은 태어날 때부터 여자인 죄로 엄마의 사랑도 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몰래 눈치를 보며 받아야 했고, 남자 형제들은 남자로 태어난 특권으로 할아버지의 온갖 관심과 사랑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어릴 적 시절은 아름답게 추억하며 그 때를 그리워할 만한 특별함이 없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너무 가난해서 먹지 못해 배고팠던 기억도 없고, 또한 풍족해서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었던 기억도 없다. 월등하게 공부를 잘해서 유명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꼴찌를 하여 손가락질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중간쯤에서 별로 존재감 없이 자랐다. 가족 사이에서도 언니는 첫째니까 살림 밑천이라서, 셋째는 선도 안보고 데려갈 만큼 착해서, 넷째는 남자 동생을 봤다고, 다섯째는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들이라, 여섯째는 딸 중에 막내라서, 일곱째는 아들이고 막내라서 좀 특별했는데, 나는 아무런 타이틀도 없이 아들이었으면 했는데 딸로 태어나 주는 거 없이 미운 털이 박혀 태어났다.

그래서 그런지 어렸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문열이’라는 말이었는데 뜻인 즉, 새끼들 중에 가장 작고 못생긴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실제로도 다른 자매들과 비교해보면 키도 작고, 눈도 작고 예쁘게 꾸밀 줄도 모르고, 늘 배고파 보인다는 농담들을 하는 것을 보면 문열이는 확실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든든하게 의지할 오빠가 없어서 아쉬워하는 여동생들한테는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어서 요즘 말로 오지랖이 넓은 관계로 문제의 중심에는 늘 내가 있었다.

우리 집은 대가족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엄마, 그리고 결혼하면 의무적으로 2년 이상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아야만 하는 작은댁 식구들까지 한 지붕 세 가족이 북적거리며 살았는데, 집안 나름대로의 법과 질서가 있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 집을 방문하시는 손님들이 사온 사탕, 과자 등은 꼭 할아버지께서 개봉을 하셔서 손수 분배를 해주시는 것이었다. 사탕봉지의 사이즈가 크던 작던 여자 자매들의 양은 언제나 한 개 아니면 두 개였고, 남자 동생들은 늘 우리보다 곱절은 많은 양을 받았다. 다른 자매들은 으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나는 그런 할아버지의 행동이 잘못되고 억울하다 생각했다. 할아버지께서 경로당에 가시면 세 명의 여자 동생에게 할아버지가 오시는지 망을 보게 한 후 벽장에 숨겨 놓은 사탕을 허락도 없이 꺼내어 동생들에게 하나씩 집어 주고, 나중에 혼나는 일은 늘 내 몫이었다.

아버지께서 공무원이셨는데 전근을 다니신 관계로 초등학교 시절 동안 몇 년간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 성장했다. 어느 날인가 대전에 근무하시는 아버지 때문에 대전에 사시던 엄마가 방학이라 시골집엘 오셨다. 오시면서 포도를 한 박스 사오셨는데 할머니께서 그 포도를 부엌 안에 조그만 쌀을 넣어 놓는 광 속에 넣어 두시고는 할아버지 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다른 동생들은 마침 다 놀러 나갔고, 그 포도를 다행히 나 혼자만 보게 되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모른다.

엄마랑 할머니께서 대화를 나누시는 동안 몰래 광에 침입하여 깜깜하여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에 닿는 대로 잡아서 마구마구 먹어대고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오신 것이다. 그 순간 할머니께서 광으로 포도를 가지러 오셔서 광 문을 여시는 순간 빛의 속도로 광에서 튀어 나왔다. 할머니께서는 너무 놀라셔서 주저 앉으면서 “아이구 저놈의 도둑 고양이가 어떻게 광엘 들어 갔나?", 그리고 포도송이가 망가진 것을 보시고는 "글쎄 고양이가 포도를 먹기도 하네~” 하시면서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고 계셨다. 그 광경을 엄마가 다 보고 계셨는데 모른 체 하셨다.

둘째들은 늘 관심권에서 제외되어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한 ‘필살기’들을 스스로 개발하게 되는 것 같은데, 나는 그 덕분에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 했다. 가족 대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운동 쪽으로는 그다지 특출한 사람이 없는데 나는 할아버지 덕분에 그 쪽(?), 특히 달리기에 재능이 발달되었다. 타고 난 재능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곰방대로부터 나의 머리를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훈련으로 만들어진 특기였다. 할아버지의 훈계방식은 꼭 곰방대로 머리를 한 대씩 때리셨는데, 무방비 상태에서 몇 번 맞은 것을 제외하고 나는 주로 도망치는 편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달리기의 재능이 남다르게 발달 되었나 보다. 그냥 한 대 맞으면 끝나는데 잘못 없이 매를 맞는 것이 왜 그리 억울했었는지…. 나보다 한 살 위의 언니는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매를 맞고 서 있어서 늘 엄마를 속상하게 했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엄마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단다. 자식들을 많이 출산하시고 그에 따라 제대로 된 영양 공급도 못 받으시고, 딸을 많이 낳으신 것이 엄마의 잘못도 아닌데 딸을 많이 낳으신 죄로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스트레스 등이 원인이셨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신 것이 마치 나 때때 인 것처럼 나를 발견하신 할아버지께서 내 키보다 큰 막대기를 들고 나를 쫓아오기 시작하셨다. 그 막대기로 한 대 맞으면 살아남기 힘들 것 같아 일단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른 때는 쫓아오시기를 일찍 포기하시고 집에서 다른 방법을 강구하시는 데 그날은 끝까지 쫓아오시는 것이 아닌가! 동네를 한 바퀴 다 돌았는데도 여전히 쫓아오고 계셨다. 그런데 그 때 할아버지를 더욱 화나게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미선아 더 빨리 뛰어라~. 네 할아버지가 쫓아가니 빨리 뛰어~” 하시면서 응원을 하시고 계신 것이었다. 그래서 계획하지 않았던 할아버지와의 동네 한 바퀴 계주를 하게 되었다.

해는 점점 어두워지고, 늘 할아버지한테 들키지 않게 집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던 엄마는 병원에 입원해 계시고, 약이 오르실 대로 오르신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쫓아오고 정말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어린 나이에 겁도 나고, 하는 수 없이 교회로 도망을 가서 목사님께 사실대로 말씀 드리니 목사님께서 안쓰러워 하시면서 나를 붙잡고 기도를 해주셨다. 하루속히 가정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해 주시는데 어찌나 서럽고 뜨거운 눈물이 나는지 주체를 할 수 없었다. 결국 밤늦게 들어가 몇 대 맞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할아버지가 참 불쌍한 생각이 들면서 맞은 것이 생각보다는 억울하지 않았다.

윗집에 사는 친구가 방학 때만 되면 도시에 사는 이모 집에 머물면서 피아노를 배웠다. 그래서 학교 조회 시간에 애국가도 치고, 노래자랑을 하면 반주도 하고 주일이면 교회에서 대예배 찬송가 반주도 하고 그랬다. 사는 것도 우리보다 잘 사는 것도 아니고, 공부도 도토리 키 재기였는데 그 친구가 치는 피아노를 나는 못 치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아 가끔 도시에서 사는 이모가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

어느 날 저녁 예배 때 찬송가 반주 없이 찬송을 인도하시기에 힘이 드셨는지 목사님께서 찬송가 반주자를 위해 기도하자고 하셨는데 마치 “미선아 네가 해”라는 말씀처럼 들려 피아노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시간이 되는대로 교회로 출근하기 시작하여 피아노의 기본이 뭔지도 모르면서 혼자 독학을 시작했다. 마치 고시공부를 하듯이 그렇게 피아노에 몰입하여 시간만 나면 교회 피아노에 매달려 연습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서울에서 새로이 보건소 원장으로 부임하여 오신 분이 교회에 나오셨는데 그 원장님의 사모님께서 피아노를 전공하셨단다. 그리고 목사님의 특별 부탁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그때 그분은 태아를 임신 중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가르쳐 주셨고, 나는 제발 그만 연습하고 집에 가라고 말씀 하실 때까지 최선을 다해 연습하여 급기야 저녁예배 반주자가 되었다. 비록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그려 놓으신 나의 인생 설계 속에 계획된 것이었다. 비록 도시에서 사는 이모가 없어도 나만을 위한 맞춤형 최고의 선생님을 시골까지 보내주셨고, 그 분을 통해 배운 피아노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귀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었다.

예수를 믿으니 말씀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반드시 교회를 가야만 하는 나는 집에서는 늘 어른들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어둠의 자식처럼 살고 교회에만 가면 빛의 자녀처럼 사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집안에서는 늘 구박 덩어리로 존재감 없이 사는데, 교회만 가면 목사님이나 어른들한테 늘 칭찬을 받으니 가끔 ‘내가 잘살고 있는 것인가?’ 궁금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릴 적 내가 제일 부러웠던 사람들은 첫째, 교회 가지 않는다고 혼나는 아이들과 둘째, ‘교회 집 딸’(시골 분들이 목사님 딸을 일컫는 말)이었다.

교회에서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가는 길은 할아버지의 꾸중이 걱정되어 발걸음이 무거웠었으니 말이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가장 부러워했던 두 가지 소원이 이루어져 어느새 우리 자녀들이 그 복을 누리고 있음을 발견하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나는 비록 교회 집 딸이 되어 본적이 없지만, 우리 두 딸은 교회 집 딸이 되어 맘껏 주님을 섬겨도 꾸중 들을 일이 없고, 교회 가지 않는다고 혼나는 아이들이 제일 부러웠었는데 만약 우리 딸들이 교회를 가지 않는다고 하면 나는 분명 꾸중을 했을 것이다.

어느 날 미운 오리 새끼에 대한 책을 읽는 데 ‘그 미운 오리 새끼가 바로 내가 아닐까?’ 생각하며 “그래~ 언젠가는 내가 백조인 것을 알아보고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들 하지...”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살았다. 왕이신 그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공주님이고, 나의 신음소리까지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분이 늘 내 편이 되어 주신다는 믿음이 늘 내게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시골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를 중학교 때부터 했는데 내가 맡는 반은 늘 모범반이어서 다른 반 아이들이 나의 반 학생이 되고 싶어하는 인기 만점 교사였다. 주일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아이들의 집을 한 집, 한 집 방문하여 준비시켜 교회로 데리고 갔고, 비록 보살핌을 받을 나이였음에도 어린 아이들을 보살피고, 사랑하고 그들을 귀히 여기는 마음과 열정이 뜨거웠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일학교 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불과 8~9세 정도 밖에 나질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권위를 세워 주시고 전적으로 사용해 주셨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나이가 40이 넘은 나의 막내 동생이 주일학교 학생이었고, 내가 그 동생의 주일학교 교사였는데 지금껏 언니 같은 주일학교 교사는 본 적이 없다면서 아직도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스스로 대견한 생각이 들고 부족한 자를 사용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전인적인 인격과 성격, 성품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어린 시절의 삶이 화려하지도, 비참하지도 않고 그저 평범하고 일반적인 삶이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선교사로 사용하시기 위한 하나님 방식의 훈련이었다고 생각한다. 대가족 속에서 나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성격보다는 남을 생각하는 이타심을 배웠고, 늘 북적거렸던 가정환경 덕분에 선교지에 오는 단기팀들이나 손님들을 대접하고 섬기는 일들이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길 수 있었다. 항상 많은 식구의 음식을 하셨던 엄마를 보며 간접적인 교육 효과 덕분에 혼자서도 40여 명의 음식을 후딱 할 수 있는 배짱도 생겼다.

농촌에서 자랐기에 선교지가 오지 섬이어도, 농촌이어도 환경적인 상황에 자연스럽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도 생겼고, 주로 둘째들만이 갖게 되는 예리하고도 민첩하고 눈치 3단의 빠르고도 정확한 상황 판단 덕분에 현지인들 속에서도 그들처럼 되어가는 과정이 남들보다 빨랐다. 또 관심 받지 못한 사람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남들이 먼저 나에게 관심을 보여주고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 기다리는 것보다 쉬운 것도 나의 장점인 것 같다. 현지인 교회를 하다 보니 부모의 격려를 받지 못하고 혼자 외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청소년들에 대해 각별한 마음으로 그들을 격려하게 된 것 또한 어릴 적 외로웠던 교회생활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 사람들의 눈엔 나는 그저 2% 부족한 ‘문열이’였다. 그런데 그 문열이를 하나님의 주권으로 특별 훈련을 받게 하셨고, 그 훈련을 통해 제2막의 인생을 값지게 살아가도록 해 주셨다. 가끔씩 ‘모든 것이 준비되고, 잘 갖춰진 사람을 쓰면 쓰시는 분도 편하고 유익하련만 하필 부족한 것이 많고 허점투성이인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실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제자를 부르셨던 그 부르심을 묵상해보면, 부족하고 보잘것없기에 그분에 손에 이끌려 쓰임 받고 있는 이것이 가장 큰 특권이고 축복이 아닐까!

필자소개

남편 원인규 선교사와 1993년도에 파송받아 현재 필리핀에서 사역 중이다. 주 사역으로는 필리피노 선교사 훈련, 카이로스 사역, 파견사역과 교회사역을 하고 있다. 두 딸 찬양, 찬송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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