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jh.jpg“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주셨던 선교명령이었지만 초대교회는 이 명령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교회가 핍박을 받게 되고 흩어지게 됨으로 소극적인 선교가 진행 되었다. 특히 베드로가 선교를 깨닫지 못한 것은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다. 그는 가장 강력한 수제자요, 오순절을 경험한 자요, 파국적 사건(초자연적 기적)을 수없이 경험한 사람이었다.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고백으로 천국의 열쇠를 받은 자였다.  성령강림 이후에 한번의 설교로 사천명, 오천명을 회심시키는 사건을 경험했던 수제자 이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고 가장 멋있는 설교도 했다.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이 명령에 앉은뱅이가 일어나 성전에 들어가 주를 찬양한 사건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선교에 있어서는 무지했다. 대 사도일찌라도 선교에는 눈이 뜨이지 않았던 모습을 보면서 그의 미성숙을 읽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오순절을 경험하고 멋진 성령의 설교를 했다.

오순절은 선교의 영으로 오신 성령님의 강림이다. 이런 오순절을 경험한 후에야 베드로는 엄청난 큰 권능을 받았고 담대해 졌다.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강한 전도자로 일하게 되었다. 한번의 설교에 사천명 오천명이 회심하는 강력한 복음 증거자가 되었다. 앉은 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렸다. 엄청난 성령의 권능이 그와 함께 있음을 보게 된다. 사도행전 3장 38-39절에서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리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이런 멋진 선교의 설교를 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아직 선교의 당위성도 비전도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설교가 선교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선교는 아름다운 설교가 아니다. 행동으로 미전도 종족을 찾아 가야 하는 것이다. 베드로에게서 선교와 이론이 하나되지 못한 모습을 보게 된다. 선교는 믿음 위에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 9장에서는 죽은 다비다를 살리므로 그의 사역이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선교에 대해서는 깨달음이 없고 액션이 없었다.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오늘 날 선교를 모르는 성도들과 목회자들의 모습을 보게된다.. 기적과 능력이 선교를 알게 하지 않는다.

여전히 전통적이고 율법적이고 고집적이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선교를 이해 시키기 위해 직접 교육을 하셨다. 배고픈 베드로에게 보자기에 먹을 것을 내려 보내며 잡아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첫번의 요청을 거절한다. 전통적 유대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먹을 수 없나이다.”  주님이 이미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할 수 없고 안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셨지만 아직도 초보적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두번째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그러나 여전히 베드로는 거절한다.  그가 아직도 율법주의자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세번째의 명령이 있었지만 끝까지 거절하므로 그가 얼마나 합리적인 고집에 갖혀 있는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환상의 의미가 이방인 선교를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였지만 베드로는 그의 비복음적 사고로 인하여 깨닫지 못했다. 오순절이 지난지가 10년이 지났는데도 오순절의 선교적 의의를 아직 못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는 사건은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경건한 이방인 백부장을 통하여 베드로가 선교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선교적 거듭남이다. (행 10: 34, 35). 이것이 선교의 레마이다. 베드로는 이 고넬료를 만나지 못했다면 미성숙한 사도로 남아있을 뻔했다. 선교를 모르는 자들은 고넬료를 만나야 한다. 우리가 선교에 소망을 가지는 것은 선교지에 이처럼 복음에 목말라 하는 고넬료와 같은 자가 있다는 것이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모셔서 그 날 밤에 복음을 듣고 온 식구가 생명을 얻게 되었다. 베드로는 이 선교의 깨달음을 얻고 그 날밤에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복음을 들은 자들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 베드는 “우리와 같은 성령을 받았으니 물로 세례 줌을 누가 금하리요”라고 고백하고 이방인에게 선교 사역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이 그 밤에 구원을 받았다. 고넬료도 구원을 얻은 것이다.(행11:14)

베드로가 선교사역을 시작하고 성경을 기록했다.

드디어 베드로의 선교사역을 시작되었다. 추측컨데 안디옥을 비롯하여 여러 곳을 방문하였을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을 읽다보면 베드로의 삶의 방법이 선교사화 되지 못해서 바울의 강한 책망을 받기는 했지만 안디옥 까지 오게 된 것을 보면 엄청난 의식의 변화가 그의 생에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가 위대한 선교사가 되어 베드로전후서를 기록했다. 만인 제사장론을 기록하여 이방인도 하나님의 거룩한 일군으로 부름 받았음을 선포하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과 헌신으로 주님을 위해 달려갔다.  그는 마지막까지 생명을 드려  전파하다가 로마에서 꺼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말한다. 할렐루야! 이 베드로의 선교적 깨달음과 변화와 행동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기를 기도하자.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의 선교의 늦은 이해

야고보는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베드로의 간증을 통해 이방인들 속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듣고서야 아모스서 9장11절 이하를 깨닫게 된다. 이것을 통해 다윗의 장막의 진정한 회복이 이방인 선교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행 15: 12-21) 이 때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 중심 축을 이루게 되었다.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었던 야고보 사도가  “모든 민족으로 여호와를 찬양하게 하라.”는 다윗의 소원이 예배의 회복임을 알았을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깊히 이해하게 되었다. 야고보야 말로 선교가 외부에서 이루어진 다음에야 뒤늦게 선교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다윗의 장막의 회복은 바로 선교를 이해하는 데서 그 중요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 아모스서의 예언을 깨닫게 되고서야 선교의 문을 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