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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교회는 제중원에서 시작됐다.

알렌 선교사의 일기를 살펴보면, 1885년 6월 21일 주일 저녁에 알렌 선교사 부부와 헤론 박사 부부, 스크랜튼의 어머니가 참석한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주일예배가 드려졌다. 그 후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 외교관 포크도 이 예배에 참석했다.

1885년 10월 11일 주일, 루미스 목사의 설교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가 공동으로 성찬식을 집례한 한국교회 최초의 성찬식과 세례식도 제중원 교회에서 시작됐다. 최초의 세례식은 1886년 4월 25일 아펜젤러의 집례와 언더우드의 보좌로 스크랜턴의 딸과 아펜젤러의 딸이 유아세례를, 일본인 하야가와가 세례를 받았다. 최초의 한국인 세례는 1886년 7월 18일 한국인 노춘경이 헤론의 딸 사라 앤의 유아세례와 함께 언더우드가 집례하고 아펜젤러가 보좌하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다. 남대문교회는 한국교회의 뿌리가 되는 이 제중원 교회에서 시작됐다.

남대문 교회는 한국교회의 못자리다.

제중원은 한국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제중원 안에는 주일예배와 성찬식, 세례까지 베푸는 완전한 교회로써의 공동체가 성립됐다. 물론 그 이름은 제중원에서 생겼다 해서 제중원 교회, 구리개(한자말로 동현) 교회, 1901년에는 홍문동 교회와 합쳐지면서 중앙교회, 1904년 이후에는 남문밖 교회 등으로 불렸다. 한국 선교 초기의 선교 보고서나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서도 제주원 안에 ‘은연 중 설립된 미조직 교회’에 대한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적으로 한국교회의 못자리가 된 제중원 예배공동체는 1887년 이후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장로교)와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감리교회가 세워진 이후에도 남아 있던 성도들이 구리개 지역과 남문 밖에서 한국교회의 어머니 역할을 성실히 수행함으로 공덕교회, 청량리중앙교회, 해방교회 등 25개의 개척교회와 우즈베키스탄 등 30개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 하는 못자리 역할을 감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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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교회는 한국교회의 역사이다.

후일 남대문 교회는 세브란스 교회로서 세브란스 병원과 연희전문학교와 연계된 에비슨 선교사의 ‘트라이앵글선교전략’에 따라 ‘교회-병원-학교’라는 삼각 선교 전략의 한 축을 성실히 수행해 왔다. 선교사들뿐 아니라 초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인 서상륜, 함태영, 김익두 같은 이들이 조사와 목사로 시무했으며, 3.1독립운동의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 집사, 보건후생부장관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이용설 장로, 해방 후에는 김 구 선생과 같은 이들이 출석했다. 특히 6.25 전후 이북 피난 성도들이 ‘서울역 앞 남대문교회’를 약속의 장소로 삼을 정도였다.

해방 후 천주교인을 포함한 50만 명 내외의 성도를 가진 한국교회를 향해 ‘300만 구령운동’(대상은 다르지만 실제적으로 최초의 ‘삼백만 성도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을 전개함으로써 민족 복음화를 위해 크게 기여한 교회가 남대문 교회이다.

남대문 교회는 시대적 사명을 다하는 교회.

애국충군(愛國忠君)의 남대문 교회는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위한 근거지로, 해방 후에는 3백만 구령운동을 통한 전도운동의 진원지로, 6.25 전쟁 중에는 실향민들의 안식처로, 그리고 IMF 당시에는 노숙자들의 위로자로, 오늘날에는 선교사 파송과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병원 운영 등으로 그 시대 시대마다 성실하게 그 사명을 다해 왔다.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남대문 교회는 지금도 매 주 수요일마다 200명 이상의 직장인들이 예배를 드릴뿐 아니라, ‘알렌 기념관’은 거의 매일 같이 직장별 성경공부 모임과 예수전도단(YWAM)의 훈련과정들이 개설되어 운영되고 있다. 남산입구에 위치한 남대문 교회는 대한민국 교통 1번지 서울역과 역사의 상징인 남대문 복원과 함께 더욱 더 원대한 시대적 사명을 꿈꾸며 도약하고 있다.

남대문 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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