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백석 총회세계선교위원회(위원장 조용활)는 최근 백석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다종교 상황에서의 한국교회의 미래"라는 주제로 '2010 선교포럼'을 개최했다. 다음은 주도홍 교수(백석대 역사신학)가 전한 "기독교와 가톨릭 교회" 발표.

머리말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를 16세기 종교개혁을 중심으로 교회사적으로, 교리적으로, 법적으로 살펴보는 일은 너무도 요구된다. 20세기의 칭의론에 있어 두 측간 공동의 성명(JDDJ)을 추구했던 사실을 조명하며, 두 교회 간 여전히 끈끈한 법적 관계를 유지시키고 있는 세례이해, 그럼에도 가톨릭교회를 거짓교회로 일컫기를 주저하지 않은 점,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영성프로그램 TD나 관상기도를 한국교회가 도입한 점에 주목을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말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칭의론은 공동성명을 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것인지도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럴 때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의 관계를 나름대로 짚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까지 하나의 교회였던 그 구교와 신교의 관계가 어떤 사이인지를 아는 일은 너무도 긴급히 요구된다.

가톨릭교회를 향한 한국교회의 태도는 객관적으로 볼 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가톨릭교회는 어느 크리스천에게는 이단사설의 집단으로 무찔러야 할 적으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무관심의 대상으로, 함께 영적 순례의 길을 가는 이해 가능한 신앙의 형제로, 아니면 형제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같은 역사를 공유한 자로서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타산지석이 되는 신앙공동체로, 또는 선교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우를 본다. 이러한 다양한 이해 내지 태도는 그 나름대로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를 둘러 싼 다양한 사상과 종파, 교파를 객관적으로 바르게 인식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래서 무례한 그리스도인이 아닌 타자에 대한 신중함과 예의를 갖춘 정중하고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곧 신실한 믿음과 예의 바름이 양립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가 선포하는 복음(Text)은 우리가 사는 사회(Context)를 향하고 있기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는 밭이 어떤 밭인지를 아는 일은 복음 전파자의 과업이다. 예수님도 자신의 메시지를 받는 청중들의 형편과 상황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그 다양한 밭에 대한 예화를 들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기에 복음이 떨어지는 현장에 대한 이해는 복음전파자들에게 있어서 꼭 요구된다. 복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진리의 보편성을 지니면서도 그 복음이 선포되었던 구체적 상황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 요구된다. 언제, 누구에게, 어떠한 형편에서 주어졌는지를 아는 일은 오늘 여기에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복음을 인식하고 전파할 할 때 너무도 중요하다. 텍스트를 향한 역사적 문법적 연구가 바른 복음의 음성을 듣게 한다.

종교개혁

사실 둘은 1517년까지 본래 하나로서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una sancta catholica Ekklesia)였다.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까지 아니 종교개혁이 일어나서도 종교개혁자들은 하나이기를 추구했다. 1530년 루터교의 대 신앙고백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 1530)이 성립된 당시에도 멜란히톤과 루터는 두 측이 하나임을 잊지 않았으며, 가능한 개혁된 교회로 새로워져서 다시 하나 되기를 소망했다. 이러한 마음은 정치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황제 카알 5세(Karl V)의 부름으로, 그의 장관 니콜라스 드 그랑벨(Nicolas de Granvelle)이 그리고 팔츠주의 성주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가 주축이 되어 모인 1540년 보름스회담(Wormser Religionsgespraech)과 1541년 레겐스부르크회담(Regenburger Religionsgespraech)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참석했던 프로테스탄트 측, 곧 새로운 신앙 측의 인물들로는 마틴 부처(Martin Bucer), 요한 칼빈(Johannes Calvin),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요한 피스토리우스(Johannes Pistorius)였고, 옛 신앙, 곧 가톨릭교회 측의 인물들로는 요한 엑크(Johannes Eck) 요한 그로퍼(Johannes Gropper), 율리우스 폰 플루그(Julius von Pflug), 게다가 로마교황청의 사람으로는 가스파로 콘그타리니(Gasparo Contarini)가 자문인의 자격으로 함께 하였다. 회담에서 양 편이 함께 토의할 문건으로는 라틴어로 된 보름스 책자(Wormser Buch)의 23개의 신앙조항이었다. 첫 네 조항은 어렵지 않게 일치를 볼 수 있었는데, 5조 칭의론(Rechtfertigungslehre)에서는 이목을 집중시키는 가운데 특이하게 일치에 이르렀고, 14조의 성찬 이해에서 결정적 차이점을 드러냈고, 두 사이에 첨예한 신학적 차이점만을 부각시킨 채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5조 칭의론에 있어도 종교개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가된 의'(iustitia imputata)를 내세웠고, 가톨리교회 측은‘내재된 의’((iustitia inhaerens)를 주장하며, 두 가지 칭의론(duplex iustitia)를 함께 언급하며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려 했지만, 화체설과 교회직분에 대한 입장을 굽히지 않는 구교 측과는 하나로의 꿈은 결코 쉽지 않은 현실로 드러나 무산되고 말았다. 거기다 레겐스부르크 회담에서 신교 측으로부터 황제에게 1541년 5월 31일 공식적으로 새롭게 제시된 9가지 개혁 조항(Regensburger Buch)은 결국 한 교회로의 시도를 더욱 어렵게 하였고, 무엇이 서로에게 분명한 차이점인지를 확인하며 갈라서야만 했다. 4년 후, 가톨릭교회 종교개혁이라고 명명할 정도로 성찰의 기회를 가졌던 1545년 트렌트공회(The Council of Trent, 1545-1563)에서 가톨릭교회는 급기야 루터와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을 “불경스런 이교도”로 그리고 에라스무스를 함께 출교하기에 이르렀다. 이 트렌트공회를 통해 구교와 신교의 갈라짐은 영구히 고착화되고 말았다. 물론 20세기에 들어서야 두 진영에서 분열을 넘어 교회일치 노력을 기울여 칭의론에 있어 접근을 시도했지만, 아직 여전히 생각해야 할 많은 여지가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JDDJ

지난 2006년 7월 12일 세계 감리교와 구교가 서울에서 칭의론에 합의했다. 7년 전 1999년 가톨릭교회와 세계루터교가 합의한‘칭의 교리에 대한 교리적 합의 선언문’(Jointed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약칭:JDDJ)에 한국에서 열린 제19회 세계감리교(WMC)대회에서 감리교단이 공식적으로 이 선언에 동참하였다. 그동안 기독교가 오직 믿음에 의한 이신칭의를 강조한 반면, 가톨릭교회는 ‘믿음과 함께 선행’을 주장하면서 양측이 다른 길을 가야했다. 그러나“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이는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게 선(善)을 행할 힘을 주시고, 또한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는 칭의론에 루터교와 가톨릭교회는 공동성명을 추구하였었다.“하나님의 은혜로 의인화되고 성화된 사람들은 그들의 삶 전체에서 유혹과 죄와 싸우게 되고 그 싸움을 통해 인간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힘을 물리치는 복음의 약속으로 더욱 강해진다.”고 선언하며, 7500만 교세를 가진 세계 감리교가 동참한 것이다. 감리교회가 공동합의에 이른 몇 가지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는 루터와 카톨릭의 의인화 교리를 아우르는 매우 독특한 신학 사상을 가지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인한 구원과 신앙적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개신교와 로마 카톨릭 사이의 의인화 논쟁을 웨슬리는 그의 중심 사상인‘선행 은총’(Prevent Grace)으로 설명하고 있다....이러한 웨슬리의 신학에 기초하여 합의하게 되는 핵심 내용은‘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이는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게 선(善)을 행할 힘을 주시고, 또한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로 요약된다.”

실상은 무산된 공동선언

이러한 결과가 있기까지 양편에서 나름대로 진지한 대화가 있었다. 루터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1986년‘루터교-로마 가톨릭 합동위원회’소위원회를 구성하여, 몇 차례의 모임 끝에 1993년에 의화 교리에 관한 문헌의 초안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1994년 합동선언문 초안을 작성했으며, 1997년 합동선언문은 완성했으나 공식 발표는 연기되었다. 그러던 중 1999년 10월 31일 독일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에서 당시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 촉진위원회 카시디 추기경과 루터교 세계연맹의 크라우저 회장이 칭의론에 관한 합동선언문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일치에 이르지 못한 교리부분에 대해 언급이 국한되었지만, 당시 루터교와 가톨릭교회 간 작성된 ‘칭의론에 대한 공동 성명’은 44장으로 된 비교적 짧은 문서였는데, 그 중 40조 같은 경우는 공동선언의 한계를 보여준다:“그러므로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루터교 신앙과 로마 가톨릭식 해석의 차이점을 솔직히 수용하고 근본진리에 있는 합의들을 더 이상 들추어내지 않는다.” 이러한 공동선언에 대해 독일의 루터교회는 많은 문의를 하고 문제점을 들추어내기 시작했는데, 결정적으로 제기된 핵심은 로마가톨릭교회가 16세기 종교개혁 구원관을 진리로 인정하지 않은 점이었다. 이에 독일 개신교신학자 165명이 공동성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고, 독일 루터교회 13개 주 교회 중 유일한 바이에른 주만이 공동성명에 무조건 동의를 했으며, 3개주는 완곡한 거부를, 9개주는‘선별적 동의’를 표했을 뿐이었다. 이 결과 교황청은 1998년 6월 25일 완전한 합의가 아님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결과 공동선언은 교리문제는 미해결된 채로 반쪽 공동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나아가 1999년 10월 독일 대학교수 255명은 공동성명에 공개적 반대를 표하면서 신구교 대표들의 서명을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곧 양측 간 교리의 일치는 한계가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오늘 개혁신학이 JDDJ에 공동으로 입장을 같이하기에는 넘어야 할 많은 산이 가로막고 있다. 또한 가톨릭교회가 왜 이러한 시도를 하는지 짚어보아야 할 점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1541년 레겐스부르크 회담에서 전가된 의와 내재된 의 사이에 분명 일치할 수 없는 양측의 구원관이 존재함을 분명한 사실로 드러났었고, 그 결과 각자 다른 길을 가야만 했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짚고 넘어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가톨릭교회가 개신교를 바라보는 입장이 대등한 교회로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사실 가톨릭교회는 1962-1965년 열린 제2바티칸공회에서 개신교를 공적 교회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교회적 공동체’라고 일컬으며 여전히 개신교를 향한 곱지 않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이 사실이다.‘교회적 공동체’란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아직도 진정한 교회로 볼 수 없다는 공적 비하를 숨기지 않고 있는 말이다. 거기다 제2바티칸공회는 다원주의적 구원관을 제시했는데, 기독교에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교에도,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특별계시와 연관된 이슬람에도 구원이 있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거기다 기독교가 분명 교회사적으로 로마교회는 많은 실수와 비 진리적 오류를 자행했던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로마교회는 이러한 교회사적 지난 잘못을 회개하며 그리고 각기 다른 신학적 입장을 정정당당하게 공적으로 표명하여 일치를 모색함이 당연하다. 거기다 JDDJ 자체의 내용을 신중하게 별도로 다루어야 함을 전제로 함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영세와 세례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는 얼마만큼 교회법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우선적으로 물을 수 있는 것은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영세는 개신교에서 얼마만큼 효력이 있으며, 법적으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일 것이다. 오늘날 교회와 목사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영세 받은 자들에게 재세례를 베풀지 않고 소정의 절차, 교육을 받은 후 공적으로 신교의 세례교인으로 공포하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려면, 역사적 인식이 요구된다.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영세를 개신교에서 세례로 인정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은 종교개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 츠빙글리, 칼빈이 구교에서 받은 영세를 어떻게 인정했는가 하는 물음과 연결될 수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세례를 무효화한 후 다시 세례를 받았는지 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답은 그들이 재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세례를 요구하는 자들을 도리어 백안시하고 정죄하기까지 했다. 루터에게 있어서 재세례파들은 결국 타도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다. 1534-1535년 독일 베스트팔렌 뮌스터에서의 비극적 사건은 루터가 얼마나 재세례주의자들을 농민전쟁의 토마스 뮌처를 대하듯이 ‘광신자’로 몰아 미워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가 된다. 물론 다른 관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톨릭교회에서 받은 유아세례를 개신교에서도 인정하고 시작하였다는 말이다. 이는 종교개혁 초기 가톨릭교회와 신교사이의 법적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초판(1536년)에서 중세교회에서 받은 세례를“하나님께로부터 온 세례”로 확신하며 이에 대한 언급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오늘날 재세례파들은 우리가 교황제도 아래에서 불경건한 우상숭배자들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이므로 그것이 올바르게 받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격정적으로 재세례를 고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28:19) 세례 받은 사실과, 또 세례라는 것은 누가 그것을 시행하든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그들의 어리석은 이론에 강력한 논증을 갖추고서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칼빈의 근거는 “곧 성례는 결코 그 집행하는 자의 손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내어 주신 분이신 하나님의 손에서 받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초대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도 발견된다. 칼빈 역시 23년이 지난 1559년 그의 최종판 「기독교강요」에서도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의 도나투스교회를 향한 논증을 예로 들어 설명하며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다. 로마의 핍박의 시절 배도하거나 잘못된 길을 걸어갔던 성직자들이 베푼 세례를 무효화하며 재세례를 강요하였던 도나투스교회에게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설득하며 중재에 나섰다.“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의 의로움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오직 그분만이 나를 깨끗하게 하실 뿐이다. 나는 세례를 베푸는 그 종을 믿지 않고, 조인들을 의롭게 하시는 그 분을 믿는다.” 1647년 공포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장 7조 역시 특별한 언급이 없지만, “세례의 성례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오직 한 번만 베풀어질 것이다.”고 말한다. 물론 19세기 개혁파신학자 헤페에게서도 다르지 않은 입장을 본다.“이단의 세례는 강조적으로 거부되고 무효로 간주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교리를 고백하는 이단의 세례(그리고 로마교회가 시행하는 세례)는 진정한 세례로 고려되어야 한다.” 20세기에 들어서 벌코프의 입장 역시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태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물론 세례를 보는 신학이 가톨릭교회와는 다름을 인식하면서도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개혁교회는 또한 가톨릭교회와 다른 교파들이 베푼 세례를 인정했다. 단, 삼위일체를 부인한 교파의 세례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지니주의자와 유니테리안의 세례는 존중하기를 거부했다.”

‘거짓교회’

칼빈이 로마교회의 영세를 개혁교회 신학의 범위 안에서 인정한다고 해서, 로마교회를 인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를 넘는다. 한 마디로 로마교회를 칼빈은 거짓교회로 보고 있다. 물론 가톨릭교회의 영세를 인정하는 면과 거짓교회로 정죄하는 칼빈의 두 입장 사이에는 나름대로 분명한 설명이 요구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칼빈은 로마교회의 교황을 “그 사악하고 가증된 왕국의 수괴요 기수”로 여긴다. 그럼에도 그 로마교회 안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자기 백성의 남은 자들이” 여전히 진정한 교회로 존재하고 있음을 믿는다. 칼빈이 당시 로마교회를 거짓교회로 보는 판단의 배경에는 근본교리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곧 도덕적 결점이나, 사소한 오류들 곧 비근본교리들 때문에 그러한 판단을 하지는 않는다. 칼빈은 로마교회에 꼭 있어야 할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말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심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로마교회 안에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들이 존재함을 칼빈은 부인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를 통해서인데, 첫째는 세례이며, 둘째로는 그 가운데 남아 있는 자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첫째로, 그는 그 언약의 증거로서 거기에 세례가 유지되도록 하셨다. 주님 자신의 입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세우신 것으로서 사람들의 불경건에도 불구하고 그 효력이 그대로 유지되도록 하신 것이다. 둘째로, 그의 섭리로써 다른 흔적들이 남아 있도록 하셔서 교회가 완전히 멸절되지는 않도록 하신 것이다. 건물이 무너질 때에 흔히 그 기초와 그 잔재가 남아 있듯이, 주님께서는 적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교회가 기초까지 사라질 정도로 완전히 무너지게는 허용하지 않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이 로마교회의 세례를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는 칼빈이 생각하는 세례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세례를 신앙고백의 증표로만 생각하는 자들을“세례의 주된 목적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일괄하며, 세례는 첫째로 우리의 죄 씻음을 보증하고, 우리의 온 생애 전체가 단번에 깨끗이 씻음 받고 정결케 됨을 확신했다.“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순결이 우리에게 베풀어졌으니, 그의 순결이 언제나 우리 속에서 역사하며, 흠과 티로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순결이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깨끗케 하고 묻어 버리는 것이다.” 둘째로, 칼빈은 세례를 통해 성도들이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새 생명을 얻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셋째로, 칼빈에게 있어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보증하여, 성도들이 그리스도가 누리는 모든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되었음을 증거한다.

제2바티칸공회

1962년-1965년 교황 요한 23세의 부름에 따라 로마교황청 바티칸에서 모인 공의회는 개신교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요한 23세(1958-1963년 재위)는 가톨릭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황으로 기억되는데, 자유주의, 진보주의, 통합주의 조류들을 가톨릭교회에 도입한 인물이다. 앞에 언급했지만, 제2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종교다원주의, 혼합주의 입장까지를 넘나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공회 역사상 가장 많은 2500여명이 모인 제2바티칸공회는 새로운 교리가 선포되지는 않았지만, 시대의 문제를 교회개혁의 관점에서 다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선포된 16개 항목 중 성례집전에 관한 규정이 눈에 띄는데, 일반신도의 성찬배도의 참여가 허락되었으며,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의하였으며, 평신도들이 성직자들을 추종하여야 한다는 교권주의를 멀리했으며, 교황권과 주교권의 관계를 쌍방적 유기적 관계로 이해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회복할 것을 소망하며 교회일치운동의 비전을 드러냈다. 이를 위해 가톨릭교회 밖의 교회“갈라진 형제들”과도 교회일치를 위한 대화를 촉구하였다. 그럼에도 교회연합은 오직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가톨릭교회에로 하나 됨을 잊지 않았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나누어진 개신교의 지위를“교회적 공동체”(communitates ecclesiales)로 규정했다. 가톨릭교회는 칭의론에 대해 공동성명을 추구하면서 개신교 측의 이의를 염두에 두면서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개신교를 “본래적 의미에 있어서 교회”(Kirche im eigentlichen Sinn)라는 입장을 밝히면서,“화해된 다양성 속에서 일치”(Einheit in versoehnter Verschiedenheit)를 추구하였다.

가톨릭교회적 영성훈련

꽤 오래 전 도입된 스페인 가톨릭 수도원의 영성프로그램으로 시행되는‘뜨레스 디아스’(Tres Dias: 약칭-TD)와 얼마 전부터 한국교회가 관심을 갖게 된 관상기도(contemplatio)는 대표적 가톨릭교회의 영성훈련 프로그램으로 가져와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어떤 경로를 통해, 무엇 때문에 한국교회에 유입되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시기적으로 보면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이 어느 순간 우리 사이에 새롭게 회자되면서부터인 것으로 추측된다. 분명한 것은 가톨릭 요소들이 개신교의 프로그램으로 도입될 때는 말할 것도 없이 근원이 되는 종교개혁 신학을 필터로 한 스크린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의식 없이 무분별하게 들여온 점이 없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교회에 주는 혼란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데, TD의 경우 초창기 교회에 혼란과 어려움을 주었다. TD를 앞서서 이끌었던 LA의 한 교회는 상당한 기간 이단논쟁에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으며 많은 부분 수정을 하고 나서야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TD의 문제점을 몇 가지로 들 수 있는데, 아담은 인류가운데 최초로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이라는 창조 전 창조설, 모든 병은 귀신의 역사라는 귀신론, 너무 신비적 합일에 이르러는 추구에 몰두한 신비주의적 성찬이해, 예배 중에 성경을 갖지 않고 성경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은혜를 떨어뜨린다는 식의 혼란을 초래한 비정상적 성경이해, 자신들의 교회만이 참 교회라는 식의 입장으로 교회분열을 타의든 본의든 서슴지 않았던 과격한 교회론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관상기도의 경우도 영성훈련 프로그램으로 개신교에서 도입하고 있지만, 보다 신중한 스크린과정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 근저에 깔려 있는 신학이 과연‘오직 믿음’(sola fides),‘오직 은혜’(sola Scriptura)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종교개혁의 '이신칭의'의 신학과 일치하는지를 묻는 일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후 만약 개신교회에 들여올 경우 어느 부분을 점검하여 버리고 보완하여 들여올 수 있는 것인지 심사숙고해야 한다. 물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면이 많을 경우 수정 보완하여 도입하는 지혜와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급한 대로 우선 한 번 도입해보고 난 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이미 많은 상처를 입고 난 후일 수 있다. 목사 개인의 긍정적 체험으로 교회 프로그램으로 도입될 경우 교회의 미치는 영향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현재 분당의 앞서 가는 G교회가 관상기도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러한 최소한의 과정을 거치면서 도입하였는지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G교회의 L목사는 관상기도를 묵상기도와 관조적 삶의 여유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래 가톨릭교회가 추구하는 관상기도의 본질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L목사는 이러한 맥락에서 관상기도에 대한 신중한 입장도 견지하고 있음은 다행스럽다.“제가 우리 교회에서 적용하는 초점은 QT 후에 반드시 5-10분간 조용히 침묵하는 시간을 갖도록 권면한다.”고 L목사는 소개하고“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으면 이제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인도를 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제가 강조하는 기도 훈련의 초점은 그것이 사실상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며,“그러나 저는 복음주의자로서 여러 관상기도를 비판하는 분들이 지적하는 면들을 함께 주의해서 경계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덧붙인다.

가톨릭교회가 말하는 관상이란 신앙생활의 최 정점, 천국을 누리는 상태라는 점이다. 그 한 예로 중세 최고의 인물 성 버나드를 들 수 있는데, 아가서 설교에서 관상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듯이 가까이 알고 보는 상태에 이르는 것으로 버나드는 자신의“유일한 갈망”으로 제시한다. 한국교회의 대표적 상징적 목사가 그 어떠한 일을 추구할 때 본질에 들어가지 않은 채 피상적인 부분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는 양 긍정적 태도를 보인다면 신중하지 못한 자세이다. 사실 L목사는 칼럼 “관상과 행동의 미학”이라는 글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관상기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글은 결국 L목사를 존경하는 분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나중 L목사가 입장을 조심스럽게 정리하며 바꾼다 치더라도 이미 예상보다 큰 파장을 낳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 핵심에는 독일교회가 JDDJ에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이해할 때 드러나는 문제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곧 구원론에 있어 그렇게 쉽게 두 측간에는 합의에 이르는 것이 어렵다는 점으로, 구원에 이르는 일종의 행위구원의 수단으로 시행하는 TD와 관상기도를 바라보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에 분명한 인식과 수정이 요구되는 바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맥락에서 필히 개신교는 비판적 고찰 내지는 인식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저 좋으면 좋다는 식의 맹목적 혼합 내지는 일치주의는 주의를 요한다.

카이퍼와 테레사

미시건의 칼빈대학교에서 17년간 가르쳤고, 현재 캘리포니아의 풀러신학교의 교장으로 섬기고 있는 리차드 마우의 말은 개신교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가톨릭교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에 그 나름대로 통찰력을 준다.

“나는 유대인을 포함한 비그리스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유대인을 한갓 전도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나는 복음 전도와 대화 중 어느 하나를 다른 것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두 가지 모두에 가치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사실, 대화는 복음전도를 위한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으며,‘관계중심적인 전도’를 주창하는 복음주의자들이 강조해 온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과업은 (타인의) 눈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그분을 볼 수 없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삶 속에서 그분을 볼 수 없다면 그분을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요구되는 만큼 다른 이들과 차별성 있게 살아간다면, 그를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에는 의문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런 의문을 예리하게 다듬어 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스티븐 닐을 인용)

개혁주의신학의 대표적 인물로 영역 주권론을 강조하며 네덜란드 수상을 역임했던 칼빈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가 가톨릭교회에 속한 수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마더 테레사(1910-1997)를 리차드 마우의 사상에서 만났다. 물론 이 두 사람이 리차드 마우의 신앙과 삶 속에서 만나 기독교적 정중하고 예의 바른 시민교양을 형성하였다는 말이다.

“카이퍼는 승리하신 왕 곧 권능으로 하늘의 보좌에 승천하신 왕에게 초점을 맞추기를 좋아했다. 테레사 수녀는 아직도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 가운데서 고통 받고 있는 우리의 구원자를 찾으라고 요청한다. 서로 다른 방식이긴 해도 두 사람 모두 그 승리의 주님을 섬기는 데 헌신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우리가 시민교양을 계발하려면 두 사람 모두에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들도 서로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 테레사 수녀를 만나다!”

그렇다면 마우에게 있어 실질적으로 기독교인이 가톨릭 교인을 만나는 일은 불교도나 이슬람을 만나는 일과는 뭔가 구별이 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맺는말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의 신학적 관계를 종교개혁 당시와 오늘에 이르러서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물론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는 1517년 이전까지는 분명 하나였다. 아니 단지 하나의 교회일 뿐이었다. 물론 오늘에도 개신교와 가톨릭교회는 같은 사도신경을 암송하고 있으며, 하나의 교회(una sacta catholica ekklesia)를 고백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마지막까지 교회가 분열하기 보다는 보다 바른 개혁된 그 하나의 교회이길 갈망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24년이 지난 1541년 시점에서도 앞에 언급한 대로 두 측의 사람들은 하나의 교회를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만, 칭의론에서 두 측은 결코 하나 될 수 없음을 확인하였고, 결정적으로 다른 길을 가야만 했다. 성찬에 대한 이해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칼빈은 그 구 신앙 안에도 바른 신앙을 가진 그루터기 교회가 존재함을 끝까지 믿었고, 가톨릭교회의 세례에도 정당성을 부여하길 잊지 않았는데, 세례를 주는 자는 성삼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개신교와 가톨릭교회와의 오늘에 이르러서까지도 법적 관계는 가톨릭교회의 영세를 개신교가 인정하고 있는 점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많은 부분 다른 구원관에도 불구하고 세례의 목적과 효능은 불변함을 믿었다는 말이다. 물론 감리교와 루터교 등 최근 구원론에 공동성명에 이른 것은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다고 믿기 때문인 점에는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독일 루터교 안에서도 분명하게 말하면 대다수가 합의에 이를 수 없었던 것을 보면, 차이점과 한계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6세기 종교개혁의 교회가 분리되며 믿는 바 ‘전가된 의’가 가톨릭교회의 입장 ‘내재된 의’의 관점에서 보다 명료하게 인정을 받아야만 두 측의 칭의론이 합의에 이를 수 있음을 인식할 때 제2바티칸 공의회의 추구였던 교회일치주의에서 나온 무리한 행동으로 밖에 더 이상 볼 수 없다. 물론 감리교의 구원관이 어쩌면 다른 교파보다는 상당부분 가톨릭교회의 구원관과 공통점을 이루기에 공동성명이 나올 수 있었던 점은 인정한다. 그렇지만 오늘 한국교회가 영성신학을 강조하며 도입하고 벤처마킹해온 수도원운동적 영성훈련 프로그램으로 가져온 TD, 관상기도 등은 종교개혁 신학의 필터링을 이뤄져야 함이 옳다. 그런 후 수정 보완하여 한국교회의 프로그램으로 재정립하여 활용함이 바람직하다. 무분별하고 무질서한 도입은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고, 심지어는 잘못된 신앙에 빠질 위험이 없지 않다. 게다가 가톨릭교회가 칭의론에 있어 분명한 차이점이 두 측간에 있음을 알면서도 무리한 시도를 감행한 것은 제2바티칸공의회의 신학적 입장과도 상관성이 있다 하겠다. 유대교와 이슬람까지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생각하는 바, 그들의 입장이라면 종교개혁의 구원관이 결정적으로 다름을 알면서도 교회일치주의라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이를 시행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세계교회를 하나로 묶어보려는 마음이 엄격하게 교리를 따지기 보다는 앞서고 있다는 말이다.

한국교회는 가톨릭교회와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불교도와 이슬람을 대하는 것과는 보다 근원적 구별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1517년 종교개혁 이전까지 우리는 하나의 교회였다. 게다가 가톨릭교회의 세례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다. 또한 가톨릭교회 안에 여전히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존재함을 믿는 신앙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역사적 법적 관계는 가톨릭교회를 보는 한 개인의 신념이나 소신, 철학과는 상이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가진 신학이나 신앙을 저버리거나 무시할 때 우리가 예의 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가진 강한 신념이나 신앙 때문에 우리가 무례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옳지 않다. 종교개혁 신앙에 굳건히 서서 우리는 예의바른 시민교양의 소유자로서 가톨릭교회를 바라보고 대화하며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여기서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신념을 수반한 교양은 힘써 노력해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확고한 신념과 시민정신을 두루 갖춘 사람을 많이 배출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더 확고한 신념을 갖도록 돕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교양을 갖추도록 돕는 것이다. 혹은 둘 다 하는 것인데, 각각의 전략이 모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시민교양을 갖추면 더욱 강한 신앙을 소유한 기독교적 신앙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확실히 요구되는 덕목은 관용이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주도홍 교수 (백석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