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말 "상황화에 따르는 위험 요소"(The Danger of Contextualization)란 주제로 죠이선교회관에서 Call of Hope Korea 주최로 '제3회 이슬람 세미나'가 열렸다. 이 행사를 주관한 TMS International 정진환 대표는 "한국교회도 여러 선교 전문가, 선교사, 학자들이 참여해 '이슬람 선교를 위한 한국교회의 지침서'를 공동으로 만들어 이슬람 선교에 혼란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본지는 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을 몇 가지 소개할 예정이며, 다만 발표자는 주최 측의 요청대로 익명으로 처리해 전달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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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라는 이름으로 하는 잘못된 교훈" (A False Teaching in the Name of Missions)
 
복음의 이슬람화
 
이것은 유혹적이다: 복음적인 선교사와 전도자들 가운데 가능한 빨리, 많은 무슬림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은 무슬림 문화와 그 종교적인 감성을 고려한다. 어떤 경우에서도 무슬림들을 자극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들은 이슬람 세계에 있는 예수 믿는 회중이 평화 가운데 성장하고, 아무런 핍박도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들은 그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핍박이란 것은 없어야 한다"

이런 그들의 배려로 인하여 다른 선교 방법이 개발되었다. 이런 정책은 1980년대 미국 복음주의 선교단체에서 시작되었고, 오늘날 많은 선교 단체에서 전파되고 있다. 이 방법은 인기가 있다. 우리가 이슬람 세계의 여러 선교지를 돌아보며 많은 서구 선교사들과 현지인들을 정기적으로 만나는데 그들은 이 방식을 제안한다. “우리 방법을 한번 써 보라”고 그들은 제안한다. “그러면 무슬림들에게 핍박을 받지 않게 하고도 그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알게 된다.”

그러나 이 방법이 약속하는 대로 성공한 경우는 없다. 이슬람 세계의 전도는 역사상 핍박 없이는 성공한 적이 없다. 우리들은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과 오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의 글을 면밀히 읽어 보았다.

고상한 의도인데 거짓 교훈이라

이런 “선교방법”이 사실은 거짓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무슬림들을 자극하지 않고 그들을 전도하려 한다. 그러기 위하여 그들은 성경적 진리를 감히 부인하고 이슬람의 가르침을 인정한다. 그 결과로 광범위하게 복음을 이슬람에 맞춘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나는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이다."

무슬림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상황화 선교사들은 자신을 “무슬림”이라 부른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란 용어는 너무 부담이 많아서 이슬람 세계에서는 사용될 수 없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또 개인의 구주로 믿는 자들은 자신을 무슬림 또는 “예수믿는 무슬림”으로 계속 불러야 한다.
무슬림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자신을 계속 무슬림이라 불러야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나 상황화 주창자들은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코란의 한 구절 을 인용하는데, 거기에는 예수의 제자들은 스스로를 무슬림이라 불렀다는 구절이 있다.

"그들은 예수를 공경했지만 모스크에서 기도했다"

상황화 선교사들은 무슬림이란 말은 문자적으로 “순복했다”는 의미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예수 무슬림”이란 예수께 순복한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를 주님으로 공경하지만, 이슬람 세계에서 살면서, 예수 믿는 믿음은 비밀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 모스크에 가서 다른 무슬림들과 함께 기도하면 된다고 한다.

교회가 아니라, 예수 모스크

이 방법에서 예상하는 것은, 모스크에 다른 무슬림들도 예수께 나아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그 숫자가 과반수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 믿는 믿음은 절대 비밀로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핍박이 일어나서 아직 어린 예수 믿는 회중이 자라기도 전에 싹 쓸려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젠가 전체 모스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고 예수를 그들이 구주로 영접한다는 꿈을 꾸고 있다. 그때는 더 이상 믿음을 감추지 않고, 이제는 그들의 모스크를 예수 모스크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다른 무슬림에게 전혀 예수를 전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가고 물으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라고 대답한다. 

예수 모스크에서 지내는 매일 매일

예수 모스크는 겉으로 보기에 다른 모스크와 다른 것이 없다. 예수를 따르는 무슬림들은 다른 무슬림처럼 기도를 하는데, 단지 이들은 기도 중에 예수를 공경한다는 것만 다르다.

“세례나 주일 예배는 필요 없다”

상황화 선교사들은 예수모스크의 모델은 완전히 성경적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성경 어느 곳에도 그리스도인들이 따로 교회 건물을 지어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이를 정당화 한다. 그들은 주일 예배와 세례도 마찬가지 이유로 부정한다. 예수 모스크의 주요 기도 시간은 금요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말을 한다. 이슬람은 교회나 세례만으로 자극받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거룩한 삼위일체를 우상숭배라고 공격하며, 그리스도인들이 “3신”을 믿는다고 저주한다.

“신약성경에 삼위일체란 없다”

무슬림들을 자극하지 않고 전도하려는 이들 상황화 선교사들은 삼위일체까지 양보할 의향이 있다. 그들은 신학적 이유를 근거하여 삼위일체를 부정하려 한다. 그들은 “신약 성경에는 삼위일체란 없다”며, 이 삼위 하나님은 나중에 이방 신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삼위일체를 믿는 것이 무슬림들을 전도하는데 유일한 장애물이며, 그들에게 가장 큰 자극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가장 큰 자극: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코란에서 가장 큰 저항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알라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자들을 저주 했고, 그들을 “불신자들”이라 불렀다. : “보라! 알라는 메시아 ,곧 마리아의 아들이라”하는 자들은 믿음을 떠난 자들이다.

마귀 또한 무하마드에게 알라는 아들이 없다고 확신을 주었다. 코란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 보다 더 큰 죄악은 없다. 

“이제 우리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지 말자”

무슬림들에게 그리스도로 자극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치워 버려야 한다. 이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상황화 선교사들은 이 “문제”를 확실히 인식했다.  그들은 “우리들은 예수를 더 이상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지 말자.”며 “우리는 예수를 메시아로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고, 아니면 이슬람 식으로 이사 알 마쉬로 부르자.”고 한다.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부인하는 것은 그냥 기술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많은 상황화 주창자들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교회 교부들이 예수를 하나님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그것은 성경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사상들이 신학 역사에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은 지금 복음적인 문서에도 많이 나타난다. 이들 저서의 저자들은 무슬림을 예수께 인도하기를 원하는데, 이 예수는 하나님도,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다.

“알라는 우리 하나님이다”

그러나 무슬림 가운데서 편안히 복음을 전하려면 성경적 교리를 부정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중에, 그들을 자극하지 않고 전도하려면 또 다른 단계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예를 들면, 알라를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화론자들은 이슬람의 알라와 성경의 하나님은 하나이며 동일한 분이라 확신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과 무슬림은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 “알라는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한다.

“모하마드는 성경적 선지자이다”

무슬림 가운데서 사역하는 사람들은 모두 “왜 당신들은 무하마드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지 않느냐? 우리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위대한 메신저로 공경하는데, 당신들이 우리 선지자를 똑같이 공경하지 않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상황화 선교사들은 이 문제도 또한 해결했다.  그들은 무하마드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했다. 어떤 상황론자들은 무하마드를 구약의 선지자 중 하나로 받아 들이기 까지 했다. 

또 다른이들은 “예수를 믿는 무슬림은 또 무하마드를 믿어도 된다.”라고 말한다.

이런 결과가 무엇인지는 다음 무슬림의 들으면 알 수 있다. “나와 내 조상들에게 참 하나님을 알도록 가르치고, 성경을 믿게 하고, 성경의 선지자들을 존경하게 만든 사람은 무하마드이다 .” 

“코란은 매우 성경적인 책이다!”

상황화론자들에 의하면, 알라가 참 하나님이고 무하마드가 그의 선지자일진대, 코란은 “하나님의 계시임에 틀림없다.” 며 우리는 진실로 이것을 믿는다고 한다.  상황화를 따르는 자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코란이 4권의 거룩한 책(이슬람에서는 토라, 시편, 복음서를 포함한다)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예수 무슬림 중 반수 이상은 이 넷 중 코란이 가장 위대하다고 믿는다.

이런 것들은 어떻게 코란의 반기독교적인 구절과 조화를 이루는가? 이런 질문이 상황화 선교사들에게는 논리적이 아니다.  그들은 코란을 반기독교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코란은 완전히 기독교, 그리스도, 성경에 호의적이다.”라고 말한다.

무하마드는 결코 코란이 반성경, 반기독교 문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오늘날 이와 다른 인상을 갖는다면, 코란의 번역에 잘못이 있다고 본다.

성경을 오용하다

무슬림들에게 핍박이 없이, 그들을 빨리, 성공적으로 복음화시키려는 열망 때문에 이런 것이 생겨났다. 이런 방법을 창안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은 복음적인 선교사들이다. 이들은 무슬림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고심했다. 그 결과란 것이 세례도, 주일 예배도 없는 “복음”이며, 3위1체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도 없는 복음이다. 이 복음은 우리 주님의 복음과 다르다.

그러나 상황화 추종자들은 이 방법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인도하신다고 확신한다. 그들은 특히 바울의 예를 든다. 그들은 고린도전서 9:19-22을 인용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들에게 내가 과 같이 된 것은 들을 얻고자 함이요”

사도를 오해하다

바울이 유대인에게 유대인처럼 된 것은 상황화론자들은 자신들이 무슬림들에게 무슬림이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황화론자들과 바울 사이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바울은 주님을 비밀스럽게 섬기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이 아직도 바리새인인 것처럼 행하지 않았다. 바울은 회당에 가만히 가서 들키지 않게 기도하지 않았다. 그의 가장 숭고한 사역 원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핍박이나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바울의 신학에 의하면, 핍박으로부터 지켜 주면서 진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상황화를 추구하는 자들이 바울을 이렇게 오용하는 것은 바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다.

왜 이런 거짓 가르침이 위험한가?

상황화론자들이 개발하려는 선교 방법은 이슬람 방식으로 정확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다른 무슬림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이슬람 세계에서 빨리, 안전하게 성장하는 것이다.

과연 이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절대로 상황화를 통하여 핍박을 피할 수는 없다. 오히려 결과가 반대라는 사실은 비극적이다.

한편으로는, 상황화라는 것이 이슬람의 교훈에 의하면 종교를 혼합하는 것으로 이단에 속하는 것이다. 이슬람 법 샤리아에 의하면 이단은 이슬람을 떠나는 것 보다 더 큰 죄악이다.  배교자는 돌아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지만, 이단은 그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 무슬림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종용 받는다. 상황론자들은 이들이 그런 중에 구원을 잃게 안내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라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