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신학회(회장 박영환)가 18일(목) 오전 11시 2010년 제1차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신진학자 이종만 박사가 “복음주의 북한 선교운동의 정치적-신학적 기원”란 주제로 발표했다. 본지는 이 박사의 논문을 두 차례에 걸쳐 전문 게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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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jm.jpg1.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의 통일론은 분단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제창한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교회는 지지하였다. 하지만 한국 전쟁 이후에는 그 기세가 약화되었고 UN이라는 국제 정치의 대결 속에서 통일의 해결을 기대하는 보다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남북 구도를 대결로 인식하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자립 경제 건설로 힘의 우의를 통한 통일론을 주창하였을 때도 통일은 궁극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승리를 통해 성취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1970년대를 접어들어 국제 냉전체제가 화해무드로 변하면서 교회 안에서 북한도 선교적 대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분단과 통일 문제를 선교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접근했다는 것은 통일론이 이제 교회 안에서 신학적인 관점에서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운동은 다분히 정치적 성격을 띠면서 동시에 북한에 대한 적대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순수한 복음 운동뿐만 아니라 동시에 통일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승리를 위한 정치적 운동으로도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홍현설 교수는 복음이 북한의 공산주의 사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했고,  김영한 교수도 복음정신이 공산주의를 초극하는 정신이라고 하였다.  한경직 목사는 북한의 악마적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복음으로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북한 선교 인식은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북한교회 재건 운동을 통해 보다 구체화 되었는데, 향후 통일을 대비해 남한 교회가 북한 지역의 교회를 1945년 해방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북한 복음화가 통일을 준비하는 일임을 천명하였다.  북한선교를 표방하는 대표단체로서 모퉁이돌 선교회, 오픈도어즈, 기독교북한선교회도 유사하거나 동조하는 노선을 견지해 오고 있다. 결국 북한 선교운동이 복음 전파가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고 북한을 해방할 것이라는 정치적 논리가 함께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복음을 공산주의 세력을 이겨내는 원동력으로 인식하는 복음주의 북한 선교 운동의 근거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해방 이후 공산주의와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선교와 공산주의의 극복의 문제를 어떻게 상호 연관되었는지 그 과정을 추적하고자 한다. 특별히, 공산주의와의 갈등과 투쟁 속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점에서 복음주의 진영의 북한 선교의 정치적 신학적 기원을 밝히려는 것이다.   

2. 북한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

2.1. 새로운 외세 정권

해방은 민족의 애환과 질곡의 역사를 일거에 해소하는 듯 보였다. 해방 이후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적 극한적 갈등이 불러올 민족적 비극을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군이 신의주에 진주할 때도 공산주의의 등장이 아니라 해방군의 입성이었다. 이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소련군은 주둔과 더불어 이러한 기대와 달리 해방군의 이름으로 약탈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소련군은 이미 히틀러의 군대를 퇴패시키고 독일을 점령한 후에 독일인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과 강간 그리고 폭력을 자행한 적이 있었다. 하와이에서 발행된 ‘국민보’에 실린 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38선 이북 평양에서 금년 3월 25일까지 소련놈의 정치압박 아래서 갖은 고생을 다하였습니다. 소련놈은 일본강도보다 더 흉악한 강도이올시다. 북한의 조선사람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서 가고 강도질을 막 합니다"

소련군의 약탈과 더불어 소위 북한에서 실시된 ‘민주개혁’은 또 다른 갈등의 시작이었다. 민주개혁은 봉건적 구조와 억압을 타파하는 것을 목적했다. 1946년에 접어 들자 북한 정권은 토지개혁에 착수했다. 북한에서 농민은 74.1%에 달하고 있었고  이들 중에 80% 는 빈농과 소작농 그리고 농업 노동자였다.  그러나 토지개혁은 농민의 70% 이상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성공에 따라 1946년 가을에 공산당원의 숫자는 급속히 증가하여 366,000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러한 일련의 개혁조치가 얼마나 강력하게 동조자를 낳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민주개혁은 피해자도 양산했다.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월남하였고 그 중에는 다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었다. 국민보의 또 다른 편지는 다음과 같이 월남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평양서 살던 살림과 집은 소련군대와 북한 공산당에게 전부다 빼앗기고, 빈 몸으로 생명만 보전되어 38선을 넘어 왔습니다. 38선 이북에서는 모든 애국자는 전부다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38선 이남으로 거지 무리처럼 매일 수 천명씩 넘어오고 있습니다…… 누님, 강도일본에게서 해방되면 우리에게 완전독립이 곧 오리라고 믿었더니, 강도소련이 미국과 협력하여 조선독립을 위해 도와준다고 미소공동위원회를 서울 덕수궁에서 열고 있으나, 그놈들은 공산국을 만들려고 조선 역적들과 손을 잡고 조선독립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공산정권의 등장과 민주 개혁의 시행은 일제와 같은 억압적 외세를 대체한 소련의 정권이 또다시 이북에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북한의 민주 개혁을 동아일보 사설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민주과업이란 독재적 폭력에 의한 그들의 소위 토지개혁과 숙청이다. 토지 개혁이란 것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이요 숙청이란 것은 인민이 아닌 자 즉 공산당원이 아닌 지식계급 유산 계급을 학살 투옥 유배 추방하는 것이다. 이 민주 과업이 일단락을 고할 때에 그들은 소위 민주헌법을 실시하고 민주 선거를 거행하여 민주인민공화국 건설 공정을 마치는 것이니 그들이 사용하는 민주라는 말은 소련 휘하 공산당 독재라는 뜻이다" 

여순 사건 발발 직후 국방부가 발표한 성명에서도 “그들이 소위 무산대중의 계급혁명을 부르짖는 것은 전 인류가 요망하는 자유와 평화를 파괴함으로써 조국을 독재자의 철쇄에 예속케 하고 3천만 자유민족을 소련의 지배하에 떨어뜨리는 상투적 모략인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조병옥 박사가 부산에서 전쟁 피난민을 상대로 행한 연설에서도 전쟁이 동일한 관점에서의 비판이 나타나고 있다. 

"소련의 사주로 김일성 도배는 소련을 조국으로 삼으며 각자 개인의 자유를 상실하는 독재적 전제국가를 만들려고 한다. 만약에 스탈린이 승리하면 개인의 자유가 상실되어 한국은 소련의 위성국화하고, 사람은 형무소의 수도(囚徒)와 같이, 기계와 같이 되고, 급(及) 기타 민족성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최태용 목사는 미군정 정치고문 러취(Leonard Bertsch)를 찾아가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의 의도가 한국에서 자신의 위성 국가를 세우는데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김재준 교수도 한국 전쟁에서 러시아의 의도는 국제 공산주의의 확산에 있다고 보았다.  이윤영 목사는 소련군을 사람의 탈을 쓴 붉은 호랑이로 비유하며 북쪽을 문을 통해 들어와 공포와 불안을 급속도로 퍼뜨리며 일제 식민지 정권보다 더 폭압적인 압제자가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해방 직후 소련군의 지원 아래 계급적 이해를 바탕으로 진행되던 북한의 일련의 개혁과 김일성 정권의 등장은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식민지 정권으로서 소련에 편입되는 과정으로 인식되었으며, 이것은 새로운 폭압적 외세 정권의 등장과 식민지 시대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월남한 사람들에게 소련은 일본 제국주의와 다른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 정권으로 이해되고 있었으며 또한 민족의 해방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2.2. 남북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에 대한 이해

교회 안에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가 해방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 시대에 기독교 민족주의 진영에서 신간회를 통한 좌우합작의 시도가 있었고, 1932년에는 사회 신경(Social Creed)를 통해서 반공을 교회의 공식적 입장으로 천명했었다.   해방과 함께 다시 등장한 공산주의는 남한 사회에서 민족의 자유를 침해하고 독재를 지향한다는 비판에 맞추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남북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은 독재와 자유의 대결로 비취게 되었다. 한민당 함상훈은 공산주의 전술과 전략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공산주의의 전술전략은 천편일률적인 선전 선동과 목적을 위하여서는 수단을 불선하는 잔인 무자비한 행동이다. 공산당은 타정당과 협조를 목적치 않고 독재 우(又)는 전제를 목적한다"

정치가 김준연은 국제 정치 무대에서의 갈등이 자유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와 독재를 지향하는 공산주의의 갈등에서 온다고 정의했다.  그는 동시에 양측 사이에는 서로 다른 민주주의의 개념이 존재하며 좌익에게는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를 의미하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닌 자들에게 공산주의는 단지 파시즘일 뿐이라고 단언하였다.  동아일보의 한 사설에서도 자유와 그로 인한 인권의 침해가 북한 공산주의의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북동포들은 공산주의의 어느 점을 실허하고 잇슬까? 토지정책을 반대하는 자도 잇스리다. 혹은 국경주의(國經主義)를 실허하는 자도 잇슬 것이다. 그러나 공통된 점은 가장 발달된 공포정치에 의해서 입과 귀를 막고 눈을 감겻다는 것, 즉 모든 자유를 속박함으로써 인간성 그 자체까지를 무시 유린햇다는 것 이점일 것이다"

자유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두 체제에 대한 구별하는 기준은 이미 해방 직후부터 기독교인들에게도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했다. 기독공보의 한 사설에서 문천걸은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북한에서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실시하려는 남북 선거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가톨릭 신자였던 장면 대사는 유엔 안정보장 이사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소련 공산당 지배하의 북한 체제에서 탄압받는 것은 개인적 자유와 인권이며 이런 억압으로 인해 교회가 가장 큰 피해자라고 증언하였다.  홍현설 교수도 북한의 전체주의는 개인의 인격과 자유라는 가지가 전혀 인정될 수 없는 체제라고 비판하였다. 

남북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독재와 자유의 투쟁으로 비치면서 자유의 개념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로 부상하게 된다. 결국 민주주의는 해방의 기초인 자유를 수호하지만, 공산주의는 전체주의로서 독재를 지향하여 식민지 시대로 회귀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남북의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계급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독재 정권과 자유를 근거로 하는 민주주의의 대결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행중인 전쟁의 정당성은 인정되며 옹호되었다. 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사람들, 곧 군인과 경찰 그리고 젊은이들과 노인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자유를 지키기 위해 희생되고 드려진 것으로 승화되었다.  전쟁 중에 이미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구호가 등장하고 있었으며,  정전 협정 반대를 위해 부산에 모인 기독교인들은 수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수호하고 위해서 희생했듯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더 큰 희생도 감수하여 전쟁을 지속할 것을 다짐하였다.  김재준 교수는 특별히 종교적 자유와 양심의 자유가 생명과 같이 소중하다고 강조하면서, 전쟁에서 승패는 3천만 민족이 공산주의의 노예로 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문제이며 해방과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더 많은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고 단언하였다.  

결국, 해방 직후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소중하게 여겨지던 가치는 민족과 교회의 ‘정치적 종교적 자유’이었으며 그것은, ‘계급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외세로부터의 해방’되어 자유를 향유하는 국가를 재건함으로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혁명에 있어서 계급적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 체제는 민족과 교회의 자유를 방해하는 새로운 억압적 정치체제로 해방 직후부터 확고하게 각인되고 있었던 것이다.

2.3. 북한에 대한 ‘이중적 관점’의 등장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비판은 북한 체제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전체주의라는 입장에서 북한을 이해하는데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이 출현하게 되었다. 북한 체제를 공산주의 정권과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백성들로 나누어, 자유를 짓밟는 정권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그리고 억압과 탄압 속에 사는 남은 자들에게는 동정의 시선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중적 관점의 첫 번째는 북한 정권에 대한 ‘적대감’이다. 해방 이후 겪었던 시련과 고통은 그 모든 원인이 공산주의에 돌려지고 있었다. 전쟁 직후 이시영 부통령은 소련 공산주의의 영향을 전쟁의 원인을 돌리며 북한 동포는 아닐 것이라고 했다.

"천만번 외에 이북괴뢰군 남침은 생각에 생각을 더하여도 이렇듯 잔인무도한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북의 자제들이 월남한 형제에게 총뿌리를 대는 것은 자기 마음이 아니다. 이북동포들에게 물어 보라. 남한을 피로 물들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대감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해석으로 확대되었다. 김재준 교수는 공산주의는 이미 하나의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종교적 현상이라고 단언하였다.  박영출 목사는 엘리야 선지자가 팔레스타인의 토속종교 바알신과 싸웠듯이, 한국기독교가 엘리야가 되어 공산주의와 투쟁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홍현설 교수도 공산주의와의 투쟁은 팔레스타인의 세속 신앙과의 투쟁이라고 해석하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한국 사회에 닥친 민족적 환란과 고통에 대한 원인을 사탄적 이념인 공산주의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사탄이 세상 모든 혼란과 불행의 원인이 되듯이,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경험된 개인적 민족적 환란은 바로 공산주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민족과 교회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며 곧 사탄이 된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해석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타협이 불가능한 적대감을 확산시켰다. 조병옥 박사는 엄마 품 속에서 살상당한 젖먹이 아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그 원수의 대상에서 제외된 이데올로기적 야수라고 단언하였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개심은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도 정당화되었다.

"기독교는 검을 쓰면 검으로 망한다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보유한 자이지만 기독교라고 해서 덮어놓고 살생을 금지하여 해충도 구제(驅除)하지 않고 맹수도 정원에 횡행하게 버려두어야 성불이 된다는 비현실론자는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한시 참으면 한시 더 살륙이요, 한놈을 애끼면 천지만류로 그 피해는 조출(造出)되는 공산주의자를 우리 국토에서 모라내는 방공투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놀디 박사(Otto Frederick Nolde)가 한국에 들어와 정전의 필요성을 역설할 때도 교회 지도자들은 사탄과의 의로운 전쟁에서 물러설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1954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CCIA (Churches’ Commission on International Affairs of the WCC) 회의에서 유호준 NCC총무는 공산주의는 사탄이며 공산주의자는 이러한 범주에서 따로 구별해 낼 수 없기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대감은 신학적 해석 속에서 정당화되었던 것이다.

북한에 대한 상반된 다른 관점은 공산 독재 정권에 아래서 사는 남아 있는 교인들과 가족들에 대한 ‘동정’이었다. 공산주의의 대한 비판이 자유의 박탈과 그로 인한 인권의 유린으로 보았기 때문에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과 동포들은 공산주의 독재와 탄압 속에 고통 받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해방 이후부터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잔혹한 경험을 통해서 체득된 것으로 북한 땅은 월남인들에게 곧 죽음의 땅이 되었던 것이다. 1949년 6월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월남인 궐기대회에서 북한에 보내는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북한 동포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고향 북한의 사정을 상기할 때에는 단자의 애절함을 금치 못한다. 조국과 민족을 파라 소련의 노애국화하랴는 매국적 근성에 뿌리박은 계급독재의 공산도배들의 허정(학정-필자) 밑에서 그 얼마마한 뼈저린 고초를 격고 있는가"

교회도 동일한 관점으로 북한동포를 인식하고 있었다. 배은희 목사는 북녘 땅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휴전이 아니라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월남자들도 이북에는 소수의 극렬 공산주의자 외에 다수의 동포가 괴뢰독재 정권 아래서 신음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북한에 남은 자들은 공산주의의 붉은 사슬에 매인 사람들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이념 대결의 인식 속에서 휴전의 결정은 특별히 남한으로 월남한 사람들에게 통일이 실현되기 전까지는 가족을 다시 볼 수 없다는 더 큰 절망을 안겨주었다.  함태영 목사는 북한 동포들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천만의 북한 동포를 어둠의 독재정권 아래에서 구출하지 못한 것이 남한에 사는 동포들의 커다란 고통과 아픔이라고 했다.

해방 이후 남북 갈등과 전쟁의 결과로 인해 북한을 바라보는 이러한 이중적 관점은 지속되었다. 전쟁 발발 5년 후인 1955년 해방 10주년 기념 대회에서 약 5-6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통일이 하루 속히 이루어져 북한에 공산독재에 억압당하고 자유를 잃어버린 형제 자매들이 해방되어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였고,  기독신보의 한 사설은 다음과 같이 북한 동포를 묘사하고 있다.

"더욱이 저 북녁 땅에는 월남동포의 이산가족이 있으며 미처 월남하지 못한 교우들이 탄식하며 기구한 생을 유지하고 있다. 30년 동안 자유를 억압 당하고 기계처럼 동물처럼 혹사를 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하루바삐 모든 억압에서 해방시켜 자유민으로서 생을 누려야 한다"  

해방 이후 이데올로기적 투쟁은 북한을 향한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을 확립시켰다. 단지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전후 남한 사회에서 자유를 기준으로 북한 정권과 동포를 이해하는 기준이었다. 결국 자유의 개념이 남북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이러한 시각은 전후 남한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투쟁의 근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계속)

이종만 박사 (예장합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