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국교회 선교역사의 산 증인인 조동진 박사의 삶을 다룬 '나의 소명, 나의 선교행전' 연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동진 박사는 한국 신학교에서 선교학 교육(1961)의 창도자이며, 비서구세계 최초의 선교사 훈련과 연구기관인 '국제선교연구원'(1963, 훗날 동서선교연구개발원)을 설립했습니다. 또 '아시아선교협의회'(AMA)와 '제3세계선교협의회'(TWMA) 등을 창립해 비서구세계 선교계의 연합을 추진했으며, 서구와 비서구권의 선교가 만나 협력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최근 열린 '2010동경대회'에서는 故 랄프 윈터 박사를 대신해 대회 전체 주제강연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조동진 박사 관련기사)

세 번째 부르심 : 동족상잔의 현장인 지리산 빨치산 소굴로

jdj2.jpg여수 쌍봉면 개척전도사로서 전도 낙제생이었던 나에게 도움을 주신 분은 여수읍 교회(지금의 여수제일교회) 김상두 목사였다. 김 목사께서는 자기 교회 개척전도사로의 생활비를 약속하고, 무교회 면인 쌍봉면 전도의 후원교회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1년 후인 1950년 3월 순천노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고, 6월 14일에는 여수읍 교회 개척교회 담당 동사목사로 안수를 받게 해주셨다.

그러나 목사로 안수를 받은 열흘 후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7월 중순에는 북한 인민군에게 여수까지 함락되었다가 석 달 만에 다시 수복됐다. 나는 얼마 동안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가 여수로 돌아왔다. 여수교회는 인민군 점령 하에서 두 명의 순교자를 냈다. 가까운 섬으로 피난했던 윤 전도사와 폐병으로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던 함경도 출신 김은기 집사를 현지 공산당원들은 인민재판으로 '예수쟁이'라는 죄목을 씌워 처형했다. 피난길에서 돌아온 김상두 목사와 나는 그들의 때늦은 장례식을 추도식과 겸해 거행했다. 그런데 이 추도장례식에 참석했던 구례읍 교회 이선용 목사와 순교자 김은기 집사의 매부로 국회위원이었던 이판열 집사가 구례로 돌아가는 길에 순천과 구례 사이 소련재 고개에서 경찰을 가장한 빨치산(파르티잔)에게 죽임을 당하는 또 다른 참사가 일어났다.

구례군에는 여덟 면이 있었고, 여덟 면에 각각 교회가 하나씩 있었다. 그 여덟 교회의 담임전도사들은 전쟁 중 모두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하고 교역자가 없는 안타까운 형편이었는데 피난해 살아남았던 단 한 사람의 교역자였던 구례읍 교회 이선용 목사마저 빨치산에게 희생된 것이다. 그 지역 순천노회는 긴급히 임시노회를 소집하고 구례의 여덟 교회의 수습과 재건을 위해 누구를 파송할지를 논의했다. 노회원 중 단 한 사람도 가겠다는 지원자가 없었다. 나는 노회원 중 가장 젊은 스물여섯 살의 젊은 목사였다. 한숨을 쉬며 기도하던 나에게 "네가 가야 한다"라고 강하게 부르시는 성령의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노회석상에서 손을 들고 일어나 "성령께서 나를 보내시기를 원하십니다"라고 소리쳤다. 나는 이렇게 세 번째 성령의 부르심을 받고 지리산 화엄사 아래 산골 구례군의 목자 없는 여덟 교회의 당 회장과 구례읍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빨치산 소굴에 들어갔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이던 지리산 아래 구례군에서 나는 1953년까지 3년 동안 빨치산과 공비토벌군 속에서 함께 살았다. 저녁 해지기 전 오후 다섯 시만 되면 빨치산들이 쏘는 박격포 소리가 '퉁'하고 폭음을 냈다. 그 때부터 토벌군과 빨치산의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멀리서 시작해 점점 가까워진다. 밤이 더 깊어지면 구례읍 내에서 빨치산들의 발자국 소리와 '따궁 따궁' 하는 소련제 장총소리를 들으면서 밤을 새우곤 했다. 총알이 날아가는 불빛이 창문에 불꽃놀이처럼 계속되는 사택에서 새벽을 기다리다가 새벽 5시 청각장애인이어서 아무 총소리도 듣지 못하던 교회 사찰이 종을 울리면 빨치산들은 날이 밝는 것을 깨닫고 발소리 요란하게 산 속으로 뛰어 달아났다. 나는 새벽기도를 인도하기 위해 길에 나섰다가 빨치산의 시체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시체의 물컹한 배를 밟기도 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통비 부락이라고 불리는 지리산 중턱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빨치산으로 몰려 토벌군에게 끌려가는 수많은 양민들을 구해내는 것도 내 전도와 목회사역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국군 토벌군에게 잡혀온 양민들 중에는 신도들과 신도의 가족들도 섞여 있어서 나는 그들을 구해내고 빨치산을 위해 밥을 지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로 몰려 끌려온 양민들을 구해내는 일에도 열심을 다했다.

내 아내는 이러한 동족상잔의 가장 슬픈 현장인 지리산 밑 구례에서 1951년 8월 12일 새벽 맏아들 응천을 낳았다. 나는 총알이 방까지 날아들어 부엌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산모와 어린 핏덩이인 맏아들을 보호해야 하는 슬픔을 이겨내야 했다. 나는 "산에 나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울지 말라"는 빨치산들의 척기가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토벌군들의 군가를 번갈아 들으며 3년 동안 목자 없는 여덟 교회를 지켜내야 했다.

드디어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이뤄지면서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이 끝났다. 나는 지리산 아래 구례읍 여덟 교회를 떠나 부산으로 나와 '기독공보'사 편집국장이 됐다. 부산에서의 편집국장 시절 나는 휴전과 함께 몰려온 미국 선교사들과의 인터뷰 기사를 '기독공보'에 실으면서 나를 전도자로 부르시어 무교회 면으로 보내시고 또다시 지리산 밑 동족상잔의 최전방에 보내셨던 성령의 뜻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전도의 낙제생이던 나는 이제 전도의 현장 실습을 끝내고 전도 원리와 이론을 본격적으로 연구할 기회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부산에서 만난 미국 팀(TEAM) 선교회의 '생명의 말씀사'를 한국에 개척하기 위해 한국에 온 윌리엄 가필드(William Garfield)와 한국에 복음방송국을 설립하겠다고 찾아온 톰 와트슨(Tom Watson) 선교사를 만나서 인터뷰를 하던 중 그들을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정부의 문화공보처에 생명의 말씀사 출판사 등록을 도와주고, 복음방송국을 세우려는 와트슨을 데리고 이승만 박사를 만나서 HLKX 방송국 설립허가를 받게 도와주었다. 이 일은 세계 선교와 복음전도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었다.

가필드 선교사는 나에게 선교와 전도를 위한 연구의 길을 강력히 권고했다. 그는 미국 풀러 신학교 출신이었다. 나는 이렇게 윌리엄 가필드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세계 선교에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계속)

조동진 박사 (조동진선교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