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한국교회 선교역사의 산 증인인 조동진 박사의 삶을 다룬 '나의 소명, 나의 선교행전' 연재를 시작합니다. 조동진 박사는 한국 신학교에서 선교학 교육(1961)의 창도자이며, 비서구세계 최초의 선교사 훈련과 연구기관인 '국제선교연구원'(1963, 훗날 동서선교연구개발원)을 설립했습니다. 또 '아시아선교협의회'(AMA)와 '제3세계선교협의회'(TWMA) 등을 창립해 비서구세계 선교계의 연합을 추진했으며, 서구와 비서구권의 선교가 만나 협력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최근 열린 '2010동경대회'에서는 故 랄프 윈터 박사를 대신해 대회 전체 주제강연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조동진 박사 관련기사)

dj.jpg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한 나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여러 차례의 부르심이 있었다. 첫 번째는 해방 후 이북 토고 교회의 부흥회에서 사역자로의 부르심이요, 두 번째는 무교회 면의 개척 전도사로의 부름이었다. 세 번째 부르심은 동족상잔의 현장 지리산 빨치산(파르티잔) 소굴로 가라는 부르심이었으며, 네 번째 부르심은 세계 선교를 위해 전도와 선교를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부르심은 서구 선교단체들과의 동반자 관계 형상을 위한 노력을 하라는 것이었고, 여섯 번째 부르심은 아시아 선교단체 간의 네트워크를 통한 동서선교 협력을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었다. 일곱 번째 부르심은 국제적 선교학 교수로 사역하도록 하는 부르심이었다. 나의 여덟 번째 부르심은 민족통일을 위한 ‘평화와 화해’의 선교 활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부르심에라고 할 수 있는 아홉 번째 부르심은 선교 현장에 나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러시아 기독교 지도력 개발원을 설립하고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러시아 목회자들을 3년 동안 교육하는 일을 비롯해, 동서선교 연구개발원 출신 젊은 신학자들과 함께 조동진 선교학 연구소를 설립하고, 21세기 새 시대를 위한 선교운동을 돕는 것이다.

사형수가 된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다.

나는 1924년 12월 29일 중국 대륙과 한반도의 접경지대를 가로질러 흐르는 압록강변에 위치한 평안북도 용천군 양광면 충렬동에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는 1905년 우리나라를 빼앗은 군국주의 일본제국에 맞서 1910년 19세의 어린 나이에 신민회 105인 사건 때부터 항일투쟁에 나서 감옥생활을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1914년 중국 상하이에 망명해 독립군 군관학교 설립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고 군사장비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배에 산적하다가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됐다. 아버지께서는 일본 제국주의 재판소에서 사형구형과 무기징역 언도를 받았다.

나는 이렇게 나라를 위해 사시던 독립운동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한국 교회 초기 그리스도인 중 한 사람이었다. 또 어머니는 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이었다.

감옥에서 죽을 병에 걸린 아버지를 일제는 투옥 7년 만인 1923년에 가석방으로 감옥에서 내보냈다. 아버지는 죽지 않고 고향 평안북도로 돌아왔다. 다시 살아난 아버지는 다음 해 어머니와 결혼해 그 다음 해 12월 19일 내가 태어났다. 일제는 아버지를 고향에 두지 않고 남쪽 끝으로 유배를 보내고 일본인의 감시 아래 두었다. 내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이었다.

나는 부모님의 신앙으로 아버지의 유배지였던 전라북도 산골짝 고창 촌락 하오산 교회에서 생후 100일 만에 서국태(Donald A. Swicord)라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에게 유아세례를 받고 어려서부터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10대 소년 시절 후반까지는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일제 경찰의 감호를 받는 아버지의 아들로, 초등학교만도 전라남북도의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던 불우한 교육 환경 아래에 있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교회에 강요하고 있을 때 내가 다니던 전라남도 광주의 숭일 학교는 결국 폐교되고 말았다. 이 때부터 신앙생활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대동아 전쟁이라고 불리던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전쟁이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아버지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여수 앞바다 금오도와 함경도 청진, 그리고 충청남도 아산의 선장(仙掌)이라는 금광촌으로 숨어 다니게 되어 일제 밑에서의 나의 학교생활은 열일곱 살에 끝나고 말았다. 나는 고향 평안북도에서 시골교회 전도사로 계시던 어머니께 돌아가서야 겨우 어린 시절의 신앙생활을 되찾게 되었다. 생후 100일 만에 유아세례를 받았던 나는 열일곱 살에 고향에 돌아가서야 평안북도 용천군 동산면 용상교회에서 민족독립 운동가였던 김예진 목사의 입교예식을 통해 공식적인 신앙고백과 교회봉사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이 무렵 고향 피현에 있던 중원학교라는 교회학교 교사가 됐다. 교사 자격증이 없던 나는 총독부가 시행하는 ‘국민학교 훈도 자격시험’을 거쳐 공식 훈도(당시에는 교사를 훈도라고 했다)가 됐다. 다음 해에 의주군 고관면 고관국민학교 교사로 전임 됐다. 이 때부터 나는 고관면 토교 교회 집사가 되어 유년부장과 제직서기와 회계, 그리고 성가대장이라는 교회의 중요한 직분들을 모두 걸머진 집사가 되어 담임목사 김태주 목사님의 총애를 받았다. 내가 봉사하던 토교 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투옥되어 순교한 박의흠 전도사가 시무하던 순교 교회로 이름난 교회였다. 나는 이 교회 집사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한 번도 목사가 되려는 뜻을 품은 적은 없었다. (계속)

조동진 박사 (조동진선교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