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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 언니는 대기근 당시 식량을 구하러 중국에 갔다가 '인신매매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지금까지 생사를 모릅니다. 어린 남동생 국범이는 나의 품에서 두 달 동안 어머니의 젖을 찾다가 굶어서 죽었습니다. 5 살 난 남동생도 역시 굶어서 죽었습니다. 당시 저는 10살의 어린 나이에 쥐를 잡아먹었고, 독 없는 풀은 다 먹었으며 학교 가방 대신 산나물 배낭과 물 지게를 지며 생계를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재미 탈북 여성 조진혜 씨는 지난 1일 통일음악회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북한 고아들이 겪는 참상과 직접 체험한 탈북자들의 실상을 전했다. 2008년 4번의 북송 끝에 탈북자 선교사 윤요한 목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그녀는 시민권을 취득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히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는 북한 고아와 탈북자들의 고통이 자리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북한에 기근이 한창이던 1996년 중국에 있는 친척집에 가서 식량을 가져오다 북한 보위부에 체포돼 극심한 고문을 받은 후 사망했다. 76세였던 할머니는 '삶은 감자 한 알 먹어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그의 옆에서 아사했다. 어머니는 식량을 구하러 간 자신의 언니를 찾기 위해 집을 나섰고, 10살 어린 소녀였던 그는 어머니 대신 동생들을 돌보며 어린 두 동생이 옆에서 죽어가는 것을 봐야했다. 또 다른 남동생 역시 길거리에서 꽃제비로 방황하다가 굶어죽었다.

그는 여덟 식구 중, 살아남은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갔다. 인신매매와 강제 북송의 위협 속에서 숨죽이며 살면서 그녀의 가족은 4번이나 북송됐고, 생존을 위한 탈출이 이어졌다.

그녀의 가족은 북한 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기억할 때마다 아직도 심장이 멎을 것 같다. 탈북자들을 모아 놓은 취조실에서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무차별적인 폭력이 이어졌고, 눈이 내린 다음날 강바람이 부는 아침, 옷을 다 벗겨 눈으로 온 몸을 씻게 한 후 운동장을 쓸게 해 동사자들이 나오기도 했다.

"북한 보위부 요원들은 북송된 탈북자들을 공을 차듯이 마구잡이로 차고, 머리채를 붙잡고 벽에 머리를 찧기도 했습니다. 구둣발로 발등과 종아리를 짓밟고, 고문을 받았던 한 남성은 비닐봉투가 머리에 쓰인 상태에서 숨을 쉬지 못했었습니다."

윤요한 목사와 함께 중국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던 그녀는 미국 시민권자인 윤 목사의 도움으로 2006년 11월 베이징 유엔 난민 고등 판무관실에 진입해 다섯 번째 탈북에 성공, 2007년 윤목사와 미 국무부 노력으로 유엔 난민국 보호를 받게 되었고, 2008년 난민 자격을 얻어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북한 인권 실상을 전하고 있는 조진혜 씨는 중국의 탈북자 강제 북송을 막고,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고아들의 망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중국은 굶주린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와 생존을 향한 유일한 통로이기에 중국의 강제 북송은 철폐되어야 하고, 탈북자들과 특히 북한 고아들을 위해 사랑과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또 "오늘도 북한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죽어가고 있다. 동생들과 같은 북한 고아들을 이 축복받은 땅으로 데려오고 싶다"며 "북한 고아들을 마음에 품고 함께 사역에 동참해 달라"고 전했다.

한편 현재 조진혜 씨는 미국으로 망명한 탈북자들을 지원하는 미주탈북민연대를 조직해 탈북자들의 정착을 돕고, 탈북자 북송 반대, 북한 인권 회복, 탈북자 망명 등의 일을 추진하고 있다.

기독일보 제공